[시선2035] 다시 사과한다 말할까
“조심하지. 미끄러운 신발 때문에 넘어졌네.” 며칠 전 비가 내린 날, 서울의 한 시내버스에서 20대 여성이 넘어지는 모습을 봤다. 빗물 때문에 바닥이 미끄러웠지만, 버스가 급하게 출발해서 넘어진 것으로 보였다. ‘쿵’ 소리에 승객들의 이목이 쏠렸을 때 버스 기사는 넘어진 이가 신은 슬리퍼를 지적했다. 책임이 없다고 생각해 사과를 안 한 것일까. 타이밍을 놓친 것일까. 최소한 “괜찮아요”라는 안부는 물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사과는 책임을 인정하는 행위지만, 내용과 방법에 따라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도 한다. 국정감사가 있는 10월은 사과의 계절이다. 어떤 사과는 주목받았고, 어떤 사과는 외면받았다. 11일 법무부 국감에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범죄 피해자 지원 제도가 부족했다고 인정했다. 그는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보복 협박을 당한 것에 대해 직접 전화해 사과했다. 피해자는 한 언론에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면서 “사과를 받은 게 처음이라 놀랍고 감사했다”는 소감을 전했다.
고용노동부 국감에서 나온 사과는 진정성을 의심받았다. 12일 조민수 코스트코코리아 대표는 지난 6월 카트 정리 업무 중 사망한 직원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하지만 이날 국감에 나온 고인의 형은 “동생이 사망한 지 116일이 지난 시점까지 회사는 단 한 번의 사과도 없었다”고 꼬집었다.
소통전문가 김호와 뇌과학자 정재승이 쓴 『쿨하게 사과하라』는 효과적인 사과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과 앞뒤로 조건과 변명을 붙이지 마라. 미안한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라.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용서를 청하라.” 이에 따르면, 사퇴를 밝힌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의 사과는 잘못됐다. 김 후보자는 국민보다 인사권자인 윤석열 대통령에게 먼저 사과했다. “불법을 저지른 적은 결코 없다”며 “주어진 방법으로 결백을 입증하겠다”고 사과 앞뒤로 변명을 붙이기도 했다.
『쿨하게 사과하라』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사과에 적합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잘못과 실수는 숨기는 것이 이성을 유혹하고 유전자를 이어가기 유리하기 때문이란다. 또 인간은 잘못을 해도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인정하고 사과하는 능력은 더 발달시켜야 한다.
곧 이태원 참사 1주기다. 이기호는 소설 『사과는 잘해요』에서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해. 그래야 사과도 한 방에 끝나지”라고 썼다. 참사 당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사흘 만에, 윤 대통령은 엿새 만에 사과했다. 그러나 유가족협의회는 18일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과 정부에 진정성 있는 사과와 위로를 부탁했다. 사과로 누군가는 마음을 얻고, 누군가는 원성을 듣는다. 다시 사과한다 말하는 건 어떨까. 조금 멀리 돌아왔지만, 기다려왔다고.(김동률 노래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중)
여성국 IT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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