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자랑대회' 들으니 망한 첫 백일장이 떠오르네요

박유정 2023. 10. 2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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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을 도로 한복판에 두고 가버린 택시... 완벽한 실패담에서 배운 것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박유정 기자]

최근 카이스트에서 실패주간을 정하고 망한 실험 대회를 연다고 해 화제가 되었다. 실패는 뼈아프지만, 그걸 숨기지 않고 이야기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고자 하는 게 참으로 멋진 젊은이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야기를 들은 뒤 나도 '완전히 망한' 첫 경험을 떠올리게 되었다. 

우선 나는 어려서 시골 중 시골에서 자랐다. 지금은 외지에 나와서 살고 있지만 20살이 되기 전까지는 매일 논밭을 쉽게 볼 수 있는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땐 2시간 정도의 어지간한 거리는 짐을 들고도 거뜬히 걸어 다녔기에, 버스나 택시를 타본 경험도 거의 없었다.

우리 동네에는 거의 모든 프랜차이즈 가게가 없거나 유일했고, 학교도 몇 곳 없었기에 택시에 타서 "여중으로 가주세요" 하면 알아서 우리 학교 앞으로 갈 수 있는 그런 동네였다. 

당시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한 나는 하루 종일 책을 읽는 학생이었다. 공부는 참 못했지만 책을 읽는 건 너무 좋아했고, 그래서 늘 어른이 되면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상상하던 학생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여름방학식 날 국어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너, 백일장 나가볼 생각 없니?" 

책읽기 빠져있던 중학생에게 찾아온 기회 
 
 책읽기 좋아하던 중학생 시절 나에게 백일장에 나갈 기회가 생겼다. (자료사진)
ⓒ unsplash
 
백일장. 말로만 들었지 한 번도 나가본 적은 없었던 차였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면 대부분 빠지지 않고 도전해보는 나였기에, 당연히 '하겠다'고 답했다.

그 뒤로 토요일인 백일장을 기다리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나는 당장에 가서 글을 쓰고 싶었고, 다 같이 앉아서 글 쓰는 모습이 빨리 보고 싶었다. 그렇게 토요일이 되자 나는 처음으로 혼자 다른 지역에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때 내심 생각하기로는 백일장에 간다고 하면 부모님이 허락해 주신다는 보장이 없었고, 괜히 얘기했다가 상을 받지 못하면 민망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이 할머니댁에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가시자마자 혼자 가방을 챙겨 터미널로 왔다.

버스로 40분 정도 걸리는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었고, 나는 오전 10시 차를 탔기 때문에 나는 12시라는 집합 시간에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바보 같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조금 뒤의 일이다. 

터미널에 도착하고 나서는 수월했다. 나는 갈 곳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나의 전 재산 4만 원과 천 원 몇 장이 있었기 때문에 택시를 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2G 폴더폰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길 찾기 어플 같은 게 없었다.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도 미리 알아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같은 시 안에 있는데 거리가 멀면 얼마나 멀겠어'라는 미련한 생각으로 터미널 앞의 택시를 잡아타고는 백일장이 열리는 장소를 말했다. 

기사님은 "알겠습니다~" 하는 경쾌한 대답과 함께 운전을 시작하셨다. 아저씨께서 왜 그렇게 신나게 대답하셨는지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그러지를 못했다. 아저씨는 나를 태우고 터미널이 있는 시내를 지나 도로를 달리고, 옆에 산이 간간이 보이는 도로까지 포함해 아주 빠른 속도로 달렸다. 택시의 요금 미터기도 그와 함께 빠르게 달렸다. 

중학생이던 나는 하얀 봉투 속에 넣어 온 돈과 미터기의 돈의 숫자를 연신 비교해 보며 뒷좌석에서 떨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단 1000원의 여윳돈만이 남았을 때, 나는 기사님께 외칠 수밖에 없었다. 

"저기요 기사님, 근데 저 돈이 이만큼밖에 없는데…"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사님은 뒤를 돌며 "얼마?" 하시더니, 내 손에 있는 돈을 가져가시고는, "그럼 학생은 여기까지만 가야겠네. 저쪽으로 쭉 걸어가면 (거기) 나와요" 하시고는 나를 도로 한복판에 내려주시고 떠나셨다. 

시골 도로 한복판에 놓였다, 혼자 

상상이 되시는지. 당시 기사님이 말한 '도로 한복판'은 정말, 단어 그대로, 도로 한복판이었다. 화물 트럭만이 간간이 부아앙 지나가고 근처에는 사람 한 명 없어 혹시 내가 여기 서 있는 게 불법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는 그런 곳. 하지만 미련하게도 나는 그 와중에 백일장에는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저씨가 가르쳐주신 방향으로 초록색 도로 표지판을 보면서 걸어갔다. 그렇게 도로 위에서 걷다가 걷다가 백일장 시작 시간인 '12시'를 맞이하고 나서야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한테 백일장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8월의 날씨에, 선크림도 바르지 않은 채, 어딘지도 모르는 도로 위를 한 시간 넘게 걷고 있는 '전재산 천 원의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했다. 부모님은 타지에 있는 할머니댁에 가서 하루 잔 뒤 다음날 돌아오시기로 한 참이었다.

전화를 통한 폰뱅킹도 못하는 때였기에 돈을 받는 것도 불가능했다. 애초에 그 도로는 사람이 다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돈을 쓸 만한 택시가 지나가지도 않았다. 나는 뒤돌아서 거꾸로 걷기 시작했다.

도로 표지판에 내가 사는 우리 지역의 이름이 쓰여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될 것도 같았다. 도로의 그 Km 수가 줄어들 때까지 나는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런 식으로 거의 2시간 반 정도인가 더 걸었을까.

나는 내 얼굴이 벌겋게 익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 때문인지 시간만 확인했는데도 핸드폰 배터리는 거의 다 닳아 있었다. 해라도 지면 좀 덜 뜨거웠을텐데, 그 8월의 낮은 잔인하게 길고도 길었다. 
 
 고속도로 위엔 대형트럭이 간간이 다닐 뿐이었다. (자료사진)
ⓒ 픽사베이
  
그렇게 한숨을 쉬며 한참을 걸어오다가 어떤 승용차 한 대가 갑자기 도로에 서는 걸 발견했다. 차 안에 앉은 남자분과 임산부로 보이는 여성분께서는, 뭔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차에서 내리셔서는 나를 쳐다보셨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도 그게 나 때문인지를 몰랐다. 나도 등을 돌려 뒤돌아서는 두 분이 바라보시는 곳에 뭐가 있는지를 같이 쳐다봤다. 그러자 두 분께서는 나에게 걸어오셔서 "너 몇 살이니?" 하고 물었고,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나는 좀 창피해지기 시작했다. '열네 살이요'라는 작은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두 분은 나를 재빨리 차에 태웠다.

완벽한 실패였지만 실패만은 아닌

그리고는 얼마나 달렸을까, 두 분은 차를 몰아 시골 중의 시골마을이던 우리 동네까지 나를 데려다주셨다. 낯선 차와 낯선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안 타겠다'라며 한사코 거절하던 나를 그 분들은 "안 그러면 곧 쓰러질 것 같아"라는 따뜻한 말로 설득한 뒤 구해주셨다(나는 운이 좋아 좋은 어른들을 만났지만, 그럼에도 남의 차를 함부로 얻어 타는 건 위험할 수 있으니 권장하지 않고 싶다). 
   
집에 돌아온 내 얼굴을 보자 언니는 '헙'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나도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원래도 새카맣던 내 얼굴인데 거울을 쳐다보니 정말이지 '시뻘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8월 여름 땡볕 아래 탄 까만 얼굴은 아주 오래갔고, 그날의 사건도 나에게 아주 오래 기억에 남았다.

선생님과 가족들에게는 '대회에 참가했는데 상을 못 받았다'고 둘러댔다. 지금도 나는 인생의 무모한 경험을 나누는 대화 자리에선 항상 이 얘기를 한다.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의 기절할 듯한 반응은 덤이다.

"넌 도대체 왜 그러니? 전화를 먼저 했어야지!"

돌아보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결과는 망했어도 나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 

그날 이후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온갖 백일장을 여행 다니듯 다니며 보냈는데, 만약 그때 내가 어른들에게 전화부터 했다면 이후 내가 여행하듯 했던 '백일장 투어'는 아마 시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그날 기억을 교훈 삼아 나는 지금도 어디를 가던지 여윳돈과 여유시간 그리고 만약을 대비한 다른 계획을 준비하고, 내가 가는 곳을 주변에 먼저 알리고 간다.

이건 무모한 출발과 계획없음이 얼마나 고된 결과로 이어지는지 뼈아프게 깨닫게 했던 내 완벽한 실패담이다. 하지만 덕분에 미리 계획을 세우는 좋은 습관을 얻었고, 운 좋게 좋은 어른들을 만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을 마냥 '흑역사'라고만 여기지는 않는다. 더불어 오늘처럼,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무용담이 하나 늘은 것도 그 사건 덕분이다. 물론 그런 일이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우리가 겪는 한 번의 '망함'은 보통 뼈아픈 결과를 낳고, 그래서 우리에게 딛고 올라설 발판이 되거나 혹은 가지 말아야 될 길을 알려준다. 망한 건 맞지만 다 망한 건 아닌 셈이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각자 망했던 역사와 그게 열어준 다른 길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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