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일본 친구들' 계승‧발전시킨 이재용, 한일 미래산업 협력 이끈다
이재용 회장, 한일 무역분쟁 시기에도 한일 경제협력 가교 역할
미래 산업 패러다임 변화 속에서도 일본 부품‧소재 기업과 협력 강화 다짐
한일 무역 분쟁이 본격화된 2019년 7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급히 일본으로 출국했다. 이 회장은 삼성의 일본 내 네트워크를 가동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양국 경제계 협력 복원 여론이 조성됐다.
당시 이재용 회장에게 힘을 실어 주고 일본 내 여론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이들은 삼성 협력회사 모임인 ‘LJF(Lee Kunhee Japanese Friends)’였다.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한일 관계가 복원된 올해 LJF 회원사들이 다시 한국에 모였다. 이재용 회장은 21일 서울 한남동 승지원(承志園)에서 열린 LJF 정례 교류회를 회장 취임 후 처음으로 주재했다.
이 회장은 이 자리에서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뜻을 계승해 삼성과 일본 부품‧소재 업계의 공고한 신뢰‧협력 관계를 미래에도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 회장은 교류회 환영사를 통해 “삼성이 오늘날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일본 부품‧소재 업계와의 협력이 큰 힘이 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그러면서 “LJF 발족 이후 지난 30년 동안 LJF 회원사와 삼성 간 신뢰와 협력은 한일 관계 부침에도 조금도 흔들림 없었다”고 평가하며 “LJF 회원사 등 일본 기업들과의 긴밀한 협력이 미래에도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또 “삼성과 일본 업계가 미래 산업을 선도하고 더 큰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천리 길을 함께 가는 소중한 벗’ 같은 신뢰·협력 관계를 앞으로도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건희 선대회장이 1993년 신경영 선언과 함께 삼성전자와 일본 내의 반도체·휴대폰·TV·가전 등 전자업계 부품·소재 기업들의 협력 체제 구축을 제안해 1993년 시작된 LJF는 그동안 한일 경제협력의 가교이자 가장 끈끈한 민간교류의 사례로 평가받아왔다.
이재용 회장은 2019년 이 선대회장을 대신해 교류회를 주재한 데 이어 올해는 회장으로서 첫 교류회를 주재하며 앞으로도 한일 양국 경제의 ‘윈-윈(Win-win)’을 위한 민간 가교로서 역할을 다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 회장은 이미 결정적 순간에 LJF의 네트워크를 십분 활용한 사례가 있다. 지난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강화로 무역 분쟁이 본격화하자 LJF를 포함한 일본 재계 네트워크를 즉각 가동해 삼성과 한국 산업계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무역 분쟁 조기 해소에 기여하기 위해 주력했다.
이 회장은 2019년 7월 무역 분쟁이 시작하자마자 일본으로 출국해 LJF 회원사 경영진을 비롯한 현지 재계 인사들과 만났고, 그해 10월에는 와병 중이던 이 선대회장 대신 LJF 정례 교류회를 한국에서 주재했다.
이 회장이 한일 관계 악화에도 흔들림 없이 삼성과 일본 유력 부품‧소재 기업들의 상호신뢰를 굳건히 다지는 교류회를 주도하면서 일본 내에서도 양국 경제계의 긴밀한 협력을 복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됐다.
이 회장은 이듬해 9월에는 경색된 한일 관계에 코로나 19까지 겹쳐 한일 양국의 기업인 왕래가 제한되자 도미타 고지 당시 주한일본대사와 만나 한국 기업인에 대한 일본 정부의 무비자 입국 금지 조치를 해제해 줄 것을 건의했다.
한일 정부는 그 해 10월 ‘기업인 특별입국절차’ 시행에 합의해 기업인 왕래를 7개월만에 재개했다. 이 같은 극적 합의가 도출된 데에는 이 회장의 호소가 큰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일 무역 분쟁은 올해 공식 종결됐다. 이 회장은 종결에 이르기까지 수 차례 비공식적으로 일본을 찾아 일본 재계와 소통하며 분쟁을 매듭짓기 위한 과정에 힘을 보탠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 회장은 일본 게이오기주쿠대 경영대학원에서 유학하고 이 선대회장을 따라 젊은 시절부터 일본 재계 리더들과 인맥을 다져왔다”면서 “한일 양국 경제계를 이어주는 소중한 가교이자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민간 외교 자산”이라고 평가했다.
이재용 회장은 지난해부터 본격화된 한일 양국의 경제 협력 복원 과정에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회장은 2022년 7월 일본 최대 재계단체인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經團聯)의 도쿠라 마사카즈 회장(스미토모화학 회장)과 히가시와라 도시아키 부회장(히타치그룹 회장)을 잇따라 만나 양국 재계의 협력 회복 방안을 논의했다.
이 회장과 게이단렌 회장단의 회동은 올해 3월 17일 도쿄 게이단렌 회관에서 열린 ‘한일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 윤석열 대통령과 국내 5대 그룹(삼성·SK·현대차·LG·롯데) 회장이 참석하며 대대적 화합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데 단초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대통령의 한일 경제인 행사 참석은 이명박 전 대통령(2009년 6월, 한일 경제인 간담회) 이후 14년 만이다.
국내 주요 그룹 회장이 다 함께 한일 경제인 행사에 참석한 것은 1998년 10월 제15차 한일 재계회의(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그룹 회장, 손길승 SK그룹 회장 참석) 이후 24년여 만이다.
이재용 회장은 올해 한일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서 “살아보니까 친구는 많을수록 좋고, 적(敵)은 적을수록 좋다”며 일본과 협력해 글로벌 경제위기, 미국-중국 무역분쟁 등에 함께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이병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 이건희 선대회장 때부터 이어진 삼성의 일본 재계 네트워크는 이재용 회장대에 와서 더욱 굳건하고 두터워졌다는 게 재계 평가다.
이건희 선대회장은 이 창업회장이 타계한 직후인 1987년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 회장을 대동하고 히타치, 마쯔시타, 소니, 도시바 등 일본 주요 고객사들을 방문했다.
이병철 창업회장 타계 이후에도 삼성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일본 주요 고객사들에게 심어 주면서, 신뢰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이재용 회장도 선대 회장들의 뜻에 따라 일본과의 신뢰 관계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오고 있다. 매년 봄 일본의 주요 고객사들을 방문해 신춘(新春) 인사회를 갖기도 하고, 이건희 선대회장이 발족한 LJF 회원사들과 지속 교류하고 있다.
특히 이 회장과 일본 투자‧IT업계의 ‘큰 손’인 손정의 소프뱅크 회장과의 친분은 유명하다. 이 회장은 지난 2019년 7월 한국을 방문한 손 회장을 만나 4차 산업혁명의 기반이 되는 차세대 통신 및 사물인터넷 등에 대해 전략적인 협력 방안을 논의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손 회장은 2013년, 2014년, 2019년 한국을 찾을 때마다 반드시 이재용 회장을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이재용 회장은 일본 통신업계에도 꾸준히 공을 들여 왔다. 삼성전자는 이 회장의 일본 내 인적 네트워크에 힘입어 NTT도코모, KDDI 등 현지 1, 2위 통신사업자에게 5G 네트워크 장비를 공급하고 있다.
일본의 수출 규제로 한일 관계가 사상 최악으로 치닫고 있던 2019년 9월에도 일본 재계는 ‘2019 일본 럭비 월드컵’에 이 회장을 초청했다. 당시 럭비 월드컵에 초청됐던 한국 기업인은 이 회장이 유일했다.
이 회장의 개막식 참석은 한일 두 나라가 갈등관계에 있지만 여전히 중요한 파트너임을 한일 양국 국민들에게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수출 규제 속에서도 오랜 기간 쌓아온 신뢰에 기반한 ‘비즈니스 협력’ 관계로 반도체와 관련된 일본산 소재는 삼성전자 생산에 차질을 빚지 않을 정도로 공급이 될 수 있었다.
이재용 회장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피해를 본 일본 기업에 무리한 납기를 요구하지 않도록 일본 법인에 지시하는 등 일본 기업과의 신뢰 구축에 힘을 쏟아왔다.
당시 이 회장은 일본의 주요 파트너들에게 위로 서한을 보내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을 보고 매우 놀랐고 안타깝다. 종업원과 가족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며, 혹시 피해가 있을 경우 빠른 복구와 생산 활동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하겠다”고 언급했다.
한편, 이번에 이재용 회장과 LJF 회원사 경영진의 정례 교류회가 열린 ‘승지원’은 삼성그룹에 의미가 큰 장소다. 이곳은 이건희 선대회장이 1987년 이병철 창업회장의 거처를 물려받아 집무실 겸 영빈관으로 개조했으며, 이 선대회장은 창업회장의 뜻을 이어받는다는 취지에서 지금의 이름을 붙였다.
승지원은 창업회장과 선대회장이 주요 손님을 맞고 ‘미래를 대비’하는 삼성의 핵심 의사결정이 이뤄진 의미 깊은 장소로, 이재용 회장도 글로벌 인사들과의 미팅에 승지원을 활용하고 있다.
이재용 회장은 지난 2022년 7월 일본 게이단렌 임원들을 승지원에서 만났으며, 2019년에는 한국을 방문한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를 승지원으로 초청해 차담회를 갖기도 했다.
LJF는 2006년 승지원에서 열린 정례 교류회를 계기로 삼성과 회원사 대표이사 중심의 교류회로 격상했다. 승지원에서 LJF 교류회가 열린 것은 17년만이며 이재용 회장이 이건희 선대회장의 뜻을 이어 일본 부품‧소재 기업과 협력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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