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백투백 시어터는 어떻게 ‘연극계 노벨상’ 받았을까

장지영 2023. 10. 22.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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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글래드윈 예술감독 인터뷰… 19~22일 모두예술극장 개관 프로그램으로 내한
국내 첫 장애예술 공연장인 ‘모두예술극장’ 개관 프로그램 참여차 내한한 브루스 글래드윈 백투백 시어터 예술감독. 지적 장애 배우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백투백 시어터는 지난해 국제 입센상을 받는 등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c)모두예술극장

국내 첫 장애예술 공연장인 ‘모두예술극장’이 지난 13일부터 개관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공연 애호가라면 모두예술극장의 개관 프로그램 가운데 지난 19~22일 연극 ‘사냥꾼의 먹이가 된 그림자’와 19~20일 퍼포먼스 영상 ‘데모크라틱 세트’를 가지고 내한한 호주 백투백 시어터(Back to back theater)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적 장애 배우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백투백 시어터는 세계적인 공연 페스티벌에 초청받는 등 주류 연극 무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엔 세계 연극계 최고 권위의 ‘국제 입센상’을 받았다. 노르웨이 정부가 2008년 창설해 격년마다 시상하는 국제 입센상은 세계 연극계에 새로운 지평을 연 개인, 단체, 기관에 주어지는 상으로 ‘연극계의 노벨상’으로 불린다. 백투백 시어터는 남반구에서 나온 첫 번째 수상자다.

백투백 시어터는 지난 2011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초청받아 처음 내한한 바 있다. 당시 선보인 ‘작은 금속 물체’는 서울역에서 펼쳐진 장소특정형(site-specific) 공연으로 새로운 미장센과 주제 접근법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목표는 훌륭한 작품 제작… 장애 관점으로만 보지 말라”

백투백 시어터가 한국에서 선보인 ‘사냥꾼의 먹이가 된 그림자’의 한 장면. (c)백투백 시어터-Kira Kynd

21일 서울 서대문구 모두예술극장에서 만난 브루스 글래드윈(57) 백투백 시어터 예술감독은 “우리의 목표는 항상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라면서 “장애나 인권, 접근성과 장애 권리를 둘러싼 모든 종류의 정치화는 예술을 만드는 목표와 일치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장애인 배우들이 등장한다고 해서 우리 작품을 장애의 관점에서만 보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가 다루는 주제는 현대사회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떠나 모두 공감할 수 있는 개인적,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이라고 강조했다.

백투백 시어터가 1987년 호주 남부 빅토리아주 소도시 질롱에서 설립된 것은 장애인 정책 변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호주는 장애인을 시설에서 수용해오다가 1980년대 인권운동과 함께 탈시설화를 추진했다. 이에 따라 지역 사회로 유입된 장애인 대상의 예술 지원이 이뤄지면서 장애예술이 빠르게 발전하게 됐다. 백투백 시어터는 지적 장애인 배우들을 포함해 비장애 음악가 및 비주얼 아티스트 등 20명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백투백 시어터가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단체가 된 데는 1999년 글래드윈이 예술감독으로 오면서부터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그는 관객으로 백투백 시어터의 공연을 관람하고는 그 잠재력을 발견했다. 그는 “어릴 때 부모님께서 장애가 있는 사람을 쳐다보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22살 때 백투백 시어터의 공연을 처음 봤을 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면서도 “하지만 미학적으로도 훌륭해서 발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어 “백투백 시어터가 비장애인 배우와 함께하는 공연에 게스트로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오디션과 워크숍을 위한 연출가로 참여했다. 그러다가 공모를 통해 예술감독이 됐다”고 설명했다.

장애 배우 시각 반영 위해 공동창작 방식

백투백 시어터가 지역 사회와 함께 만드는 퍼포먼스 영상 ‘데모크라틱 세트’ 이미지. (c)백투백 시어터

글래드윈의 예술감독 취임 이후 백투백 시어터는 지적 장애 배우들의 관심사나 시각이 작품에 반영될 수 있도록 대본을 공동집필하는 등 공동창작을 해오고 있다. 또한 매년 한 차례 호주 전역에서 다양한 예술가들을 초청해 창작 워크숍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캠프도 진행한다. 이런 방식을 통해 지금까지 10편 넘는 작품이 만들어져 국내외 투어 공연을 진행했다. 백투백 시어터는 2017년부터 보다 많은 관객을 만나기 위해 영상팀을 꾸려 기존의 공연을 장편 영화로도 만들고 있다.

현재 백투백 시어터는 4명의 장애 배우를 포함한 25명으로 구성돼 있다. 원래 6명의 장애 배우로 된 앙상블이었지만 오랜 시간 함께 작업해온 2명이 얼마전 별세한 데 이어 1명이 건강악화로 투어를 다닐 수 없게 됨에 따라 내년 3명을 새로 뽑을 예정이다. 글래드윈은 “백투백 시어터에서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3년 정도 걸린다. 레퍼토리 극단인 만큼 연간 20주 정도는 국내외에서 공연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리서치, 토론, 대화, 즉흥, 워크숍 등을 통해 작품을 만든다”면서 “예술감독인 내 역할은 배우들이 자신의 생각을 끄집어내거나 상상을 하도록 촉발하는 것이다. 우리 배우들은 연기도 하지만 창작에 더 방점이 찍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9명으로 구성된 우리 이사회에는 장애 배우 1명이 꼭 포함돼 조직 내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하는 데도 참여한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한국에서 선보인 65분 분량의 ‘사냥꾼의 먹이가 된 그림자’는 뉴욕타임스에서 읽은 기사에서 시작됐다.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지적 장애인 32명이 평생 칠면조 가공공장에서 적은 임금을 받으며 일한 것에 대한 토론이 계기다. 이후 장애인 활동가들이 주민회의에서 장애인 인권과 젠더 문제 비롯해 인공지능(AI)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확장됐다. 특히 AI와 관련해 미래 세상에서 인간은 AI 앞에 지적 장애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 작품을 토대로 한 장편영화 ‘그림자’는 다양한 영화제에 초청됐다.

신진 장애 예술가 양성하는 ‘시어터 오브 스피드’

백투백 시어터가 한국에서 선보인 ‘데모크라틱 세트’ 중 일부 장면. (c)모두예술극장

백투백 시어터는 또 극단 내에 신진 장애 예술가를 양성하는 세컨드 컴퍼니인 ‘시어터 오브 스피드(Theatre of Speed)’를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지적 장애인 멤버 15명은 매주 수요일 백투백 시어터 멤버 및 신진 예술가들과 함께 워크숍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험한다. 백투백 시어터의 배우 앙상블이 전일제 고용에 따른 급여를 받는 것과 달리 시어터 오브 스피드 멤버 15명은 호주의 국가장애보험제도(NDIS)에서 지원받는다.

이번에 백투백 시어터가 한국에서 선보인 8분 분량의 영상 ‘데모크라틱 세트’는 바로 시어터 오브 스피드의 워크숍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데모크라틱 세트’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동등한 사회적·정치적·경제적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믿음을 탐구하기 위해 지역사회와 함께 퍼포먼스 영상을 창작하는 프로젝트다. 두 개의 문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사각형의 프레임을 세트로 사용하며, 참여자들은 세트 안에서 시간을 자유롭게 보낸다. 그리고 일렬로 움직이는 카메라가 촬영한 장면들을 편집해 완성시킨다. 지금까지 약 40여 도시에서 진행됐으며, 한국에서 선보인 것은 지난 7월 서울에서 8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촬영이 이뤄졌다. 글래드윈은 “‘데모크라틱 세트’ 한국 버전은 다른 어떤 도시의 버전보다 다채롭다. 출연자들이 퍼포먼스나 의상을 매우 정성 들여 준비한 덕분”이라고 전했다.

한편 백투백 시어터의 연간 예산은 300만~400만 호주달러(한화 약 25억~30억원) 달러다. 호주 예술위원회와 빅토리아주 예술위원회에서 연간 120만 호주달러를 받지만, 그와 비슷하거나 많은 120만~160만 호주달러를 국내외 공연에서 벌어들인다. 그 나머지는 개인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채운다. 글래드윈은 “백투백 시어터의 경우 호주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일반적인 사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장애인 단체로서가 아니라 우수한 작품을 선보이는 예술 단체로서 국내외 초청을 자주 받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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