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틈바구니에서 육중한 돌에 구멍을 뚫은 여성 조각가 [진혜윤 교수의 미술, 도시 그리고 여성]
[진혜윤(한남대 회화과 교수)]
▲ 헵워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던 영국의 세인트아이브스. |
ⓒ waterborough |
파랗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 절벽 위에서 맞는 세찬 바람, 해변을 수놓는 조개 껍데기. 이런 풍경을 경험하는 순간의 감각은 어떻게 예술로 표현될 수 있을까? 전후 영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바바라 헵워스(Barbara Hepworth, 1903-1975)는 이러한 느낌을 추상 조각으로 구현한 인물이다. 자신이 경험한 자연 환경을 주요 소재로 삼았던 그의 조각은 사실적인 형상 표현이 지배적이던 영국 조각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헵워스는 생의 절반을 잉글랜드 남서부 콘월 지역에 위치한 작은 바닷가 마을 세인트아이브스(St.Ives)에서 보냈다. 세인트아이브스는 영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휴양지 중 한 곳으로 청정한 코발트색의 바다, 유려한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기암절벽, 곳곳에 산재해 있는 선사시대 거석들을 자랑한다. 이곳만의 독보적인 풍경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도 영감이 되었다. 헵워스와 그의 파트너였던 화가 벤 니콜슨, 그리고 러시아 구축주의 조각가 나움 가보 등 서양 추상 미술의 중심축을 차지하는 이들은 2차 세계대전을 피해 이곳에 모여 영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싹을 틔웠다.
▲ 헵워스의 대표작 <펠라고스>(1946) |
ⓒ Sailko |
<펠라고스>(1946)는 헵워스가 세인트아이브스의 절경에서 영감받아 만든 대표작이다. 그리스어로 '바다'라는 뜻의 제목대로 이 작품은 소라 고둥 또는 파도 거품을 떠올리게 한다. 동그랗게 말린 목조각 덩어리 내부로 흐르는 담청색이 그러한 인상을 주도한다. 분명 딱딱한 나무를 깎아서 만든 작품인데 부드러운 탄력성이 느껴진다. 중앙부를 관통하는 짧은 선들이 팽팽한 긴장감을 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형태가 단순히 자연의 일부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헵워스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창을 통해 바라본 세인트아이브스의 해안선과 수평선에 대한 인상을 조각으로 표현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본 것'이 아니라 '느낀 것'에 대한 '형식적 실험'이었다. 위, 아래, 옆 등 보는 시점에 따라 예상치 못한 형태로 나타나는 외피와 내피, 곡선과 직선의 관계성은 이 작품이 상당히 복잡하고 감각적인 경험을 조각으로 이관한 작품이란 사실을 깨닫게 한다.
헵워스는 자신의 작품이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느껴지고 경험될 수 있는 무엇이길 바랐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펠라고스>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발표된 작품이다. 다시 말해 헵워스의 순수조형적 실험은 전쟁이라는 시대적 비극이 남긴 상처와는 무관한 듯 보인다.
하지만 당시 예술의 순수한 형식적 특성에 높은 점수를 부여하던 미술계의 평가는 무엇보다도 그가 시도한 혁신적인 조각 개념에 주목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구멍'을 조각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활용하였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재료 본연의 성질과 가치에 충실하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헵워스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인 구멍은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다. 전통적으로 조각은 부피를 갖는 온전한 하나의 덩어리 그 자체에 국한된 개념이었다. 이에 반해 헵워스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음의 공간(negative space)을 수용하고 이를 양감(mass)으로 표현하려는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을 거듭했다. 그에게 공간이란 또 다른 재료였기 때문이다.
그가 구한 답은 작품에 구멍을 만듦으로써 이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만드는 풍경까지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구멍이 만드는 즉흥적인 효과는 그의 작품을 보다 역동적으로 보이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 지난 2011년 1월 18일 런던 왕립 예술원에서 열린 '현대 영국 조각' 전시회에서 한 남자가 바바라 헵워스의 '단일한 형태(Single Form)' 옆을 지나가고 있다. |
ⓒ AP/연합뉴스 |
또 헵워스는 조각을 제작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거부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 조각은 일반적으로 작가가 흙이나 왁스로 원형을 만들면 조수들이 주물을 뜨거나 대리석으로 크게 확대하여 완성하였다. 영국 현대 조각의 선구자이며 헵워스의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던 헨리 무어(Henry Moore, 1898-1986)도 이러한 제작 방식을 유지했다.
하지만 헵워스는 다른사람의 손을 빌려 작품을 완성하는 대신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재료와 크기를 고민했다. 그는 나무나 돌과 같은 재료를 사용해 직접 깎고 다듬을 수 있는 선에서 마감했다. 그래서 그의 초기작들은 동시대 남성 조각가들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다.
헵워스가 육중한 무게의 청동으로 대형 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한 시점은 공공조각을 제작해달라는 의뢰를 받으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이러한 요청은 그가 1959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최고상을 수상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이후의 일이었다. 상파울로 비엔날레는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와 미국 휘트니 비엔날레와 함께 세계 제3대 비엔날레로 간주된다.
헵워스가 활동했던 20세기 전반기 영국 사회에서 조각은 여성 창작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기본적으로 조각은 재료를 다루는 과정에서 남성적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회화보다 제약이 많은 예술이다.
▲ 바바라 헵워스의 생전 작업실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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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세인트아이브스에 자리하는 헵워스 미술관은 1949년부터 그가 사용해 온 작업실을 재활용한 공간이다. 이처럼 자신이 생전에 사용하던 작업환경이 그대로 보존되어 전시장이 되고 미술관이 되는 행운을 누리는 작가는 극히 드물다. 특정 작가의 삶과 예술세계를 조명하기 위해 세워지는 작가 미술관은 주로 작가의 탄생지에서 후대에 재가공되는 경우가 다반사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헵워스 미술관은 작가가 쓰던 도구와 반쯤 완성된 조각들이 마치 그가 그저 잠시 자리를 비운 듯한 모습으로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전쟁을 피해 피난처로 삼았던 세인트아이브스는 헵워스에게 영감의 원천이자 영원한 삶의 터전이 되었고, 이제 그의 이름과 동일시되는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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