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 위의 컬링' 론볼 국가대표 이미정 "남편이 내 몫까지 하래요"
약 35m 앞. 흰 중앙선 위에 놓여 있는, 지름 약 6㎝ 크기의 보일 듯 말 듯한 흰색 잭(표적구·jack). 2022 항저우 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한 론볼 국가대표 이미정(스포츠등급 B6·경기도장애인론볼연맹)은 잭의 위치를 확인한 뒤 자신의 휠체어를 시작 위치에 놓인 매트 위에 일부를 걸친 채 공을 굴릴 준비를 했다.
반대편에 놓인 잭에 최대한 가까운 위치에 자신의 공을 가져다 놓기 위해 섬세하게 힘을 조절해야 한다. 잔디 위로 지름 약 12cm, 무게 약 1.5㎏의 공을 힘차게 굴린다. 이미정의 손을 떠난 공은 폭 약 5m, 길이 약 40m의 링크를 따라 데굴데굴 굴러 잭을 지나쳐 일직선으로 쭉 뻗어 가나 싶더니, 이내 잭 쪽으로 방향을 틀며 흘러 들어갔다.
한 쪽은 상대적으로 무겁고 한 쪽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제작된, 구의 위 아래에서 힘을 가한 듯 살짝 납작한 모양을 한 공은 전방으로 진행하는 힘이 떨어질 때쯤 무게중심에 따른 회전력의 영향이 강해지면서 점점 경로가 휘어지며 굴러가게 된다.
이미정은 21일 중국 항저우 원후이 스쿨 론볼 경기장에서 열린 론볼 예선 조별리그 1차전에서 인도의 데비 니르말라를 약 1시간 45분만에 21-3으로 압도했다. 생각보다 미끄러운 잔디, 인조 잔디의 결로 인해 덜 적용된 스핀 등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1엔드와 6엔드, 9엔드에서 4득점을 하는 빅엔드를 만들어 내 격차를 크게 벌렸다.
장애인들이 즐기는 론볼은 익숙하지 않은 종목이다. 하지만 잔디 위의 컬링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엔드마다 총 4개의 공(단식)을 던져 상대의 공보다 잭에 가까운 공의 개수가 그대로 점수로 이어진다. 경기 제한 시간인 2시간 15분이 다 되거나, 한 선수가 21점을 먼저 내면 경기가 종료된다.
링크 끝에 있는 도랑에 빠지거나 링크 양 옆 경계를 벗어나는 공은 무효가 되기 때문에 스핀을 얼마나 줄 지 치밀하게 계산해야 한다. 다만 컬링은 '하우스'라는 표적이 고정된 경기라면, 론볼의 잭은 공 모양의 표적'구'라는 점에서 선수들이 던지는 공에 맞으면 표적도 이동한다는 특징이 있다. 표적이 움직이면 그만큼 공을 굴리는 힘을 다시 조절하고 경기 운영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컬링보다 복잡하고, 고려할 점이 많기도 하다.
잭은 직전 엔드에서 점수를 획득한 선수가 직접 굴려 원하는 위치에 갖다 놓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경기 전략을 세우고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에 후공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컬링과는 달리 선공이 유리하다.
잭에 공을 무조건 갖다 붙일 것인지, 상대 선수의 경로를 방해하는 작전을 펼칠 것인지 등 경기를 풀어 나가는 방식을 계속 고민하고, 자신이 수립한 계획에 따라 고도의 집중력과 미세한 힘 조절을 통해 신중하게 공을 굴려야 한다.
론볼은 패럴림픽 정식 종목은 아니지만, 장애인 아시아경기대회 정식종목이다. 한국 장애인 국가대표 선수단에겐 '효자 종목'이기도 하다. 2018 인도네시아 대회에선 15개의 금메달 중 무려 7개를 따냈다. 이번 대회에서도 9개 종목에 참여해 금메달 7개 이상을 노린다.
이미정은 경기 뒤 "남편 덕에 론볼을 시작했는데, 그는 아시아경기대회를 못 와봤네요. 남편 몫까지 금메달 따야죠"라고 했다. 그는 경기력에 대해서 아쉬워하며 "모든 선수가 다 똑같은 상황이라는 점에서 누가 가장 빨리 적응하는지가 중요하다. 너무 긴장해서 가슴이 쿵쾅쿵쾅 떨리고 손까지 떨리고 미치겠더라"라고 했다.
1968년생 이미정의 '장애인 생일'은 1989년 1월 27일이다. 이미정은 "21살의 나이에 척추 염증 수술을 받았고 '수술이 잘 됐다'는 말을 들었지만 오히려 수술 중 신경에 문제가 생겨 하반신이 마비됐다"고 말했다.
휠체어를 타게 된 이미정은 문을 닫고 세상과 벽을 쌓았다.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집에만 있어야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는 이미정은 론볼 선수로 활동했던 남편 심정식(스포츠등급 B7·시흥시장애인론볼연맹)의 권유로 론볼을 시작했다. 심정식은 2019년 말레이시아 론볼 아시아선수권 남자 단·복식 2관왕에 오른 국내 정상급 선수다.
항저우 대회가 1년 미뤄진 덕분에 올해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그는 "남편은 매번 국가대표를 했지만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는 늘 탈락했다. 이번 대회에서 자기 몫까지 다 하고 오라더라. 금메달을 따고 싶다"고 활짝 웃었다.
이미정을 비롯해 송명준(스포츠등급 B7·전남장애인론볼연맹), 지일주(스포츠등급 B7·부산장애인론볼연맹), 정재홍(스포츠등급 B8·광주장애인론볼연맹), 김승희(스포츠등급 B8·전북장애인론볼연맹)가 예선 조별리그 1차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산뜻하게 출발했다. [항저우(중국)=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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