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키'가 키워낸 자유의지 담론, 마블의 미래를 상상하다

전용준 2023. 10. 21.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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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드라마 <로키> 시즌 2

[전용준 기자]

드라마 <로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뽑으라면 주인공 로키(톰 히들스턴)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할 캐릭터가 있다. 바로 시즌 1의 마지막 6화에서야 실체를 드러낸, 계속 존재하는 자(조너선 메이저스)가 그러하다. 31세기의 과학자 너새니얼 리처즈의 변종인 그는 다른 변종들과의 전쟁 이후 하나의 시간선을 분리해 내어 그것을 '신성한 시간선'이라 명명하고 관리해왔다. 그 과정에서 작품의 주 무대인 시간 관리국 TVA를 세운 그는 신성한 시간선이 멀티버스에 간섭되지 않도록, 자신의 변종들이 이곳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평화를 위한다는 미명을 내세우며 분기된 가지들을 잘라내고 그 속의 생명들을 무심히 희생시켜왔다.

다시 말해 그는 가지치기를 거듭하며 수많은 인물들의 자유의지를 빼앗아왔다. 자신이 선택한 가지만을 남겨두어 모두가 그 길을 따르도록 강제했으며, 조금이라도 벗어난 자들은 어김없이 세상에서 잘라내었다. 물론 그 자신 또한 시간의 끝 성채에 홀로 앉아 신성한 시간선을 지켜볼 뿐이었으니, 어쩌면 자신의 자유마저 억압해 왔을지도 모르리라. 실제로 이번 시즌 2의 3화에서 드러난 빅터 타임리(조너선 메이저스)의 삶을 본다면, 적어도 그의 모든 변종들이 자유의지를 누리면서 살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에피소드에서 빅터는 계속 존재하는 자의 계획에 의해 본래는 접할 수조차 없었을 TVA의 책자를 손에 넣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삶에 작용한 이 작은 변수가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지 과연 그가 알 수나 있었을까. 그는 언젠가 자신이 시간선의 관리자로 성장하여 TVA를 바로 세우리라는 운명의 레일 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올려지고 말았다. 즉, 빅터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의 미래는 타인에 의해 결정되어 버린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그는 넘쳐나는 상상력과 과학적 호기심을 마음껏 발휘하며 그 레일 위를 신나게 달려갔지만, 과연 그것이 오롯이 빅터의 바람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미스 미닛과 라보나, 로키와 모비우스, 실비까지 나타나 그를 에워싼 상황에서 자신도 선택을 할 수 있다던 빅터의 말처럼, 그에게는 그만의 길을 나아가고픈 의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가 미스 미닛이 아니라 로키를 선택했다는 점은, 계속 존재하는 자의 대본을 벗어나 빅터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일종의 암시가 아니었을까.
 
 드라마 <로키> 시즌 2 스틸컷
ⓒ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로키> 시리즈가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자유의지이기에, 앞으로의 TVA는 둘로 나뉘어 대립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전과 같이 초월적 권한을 지닌 관리국으로서 시간선의 분기를 제거하자는 파벌과, 변종들의 삶을 인정하며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특수한 경우에만 개입하자는 일종의 야경국가 모델을 주장하는 파벌. 현재의 모습으로는 미스 미닛과 라보나가 전자, 로키와 모비우스는 후자에 가깝게 느껴진다.

사실 지금까지의 MCU 작품들을 보면 직접적으로 단어가 언급되지 않았을 뿐, 이미 많은 이야기 속에서 마블은 인물들의 자유의지를 다루어 왔다. 정신 조작 마법으로 헥스 속에 사람들을 가두었던 <완다비젼> 속 스칼렛 위치와 정체성을 깨닫고 어딘가로 날아가 버린 화이트 비전은 물론이요, 달의 신 콘슈와 자신의 다른 자아에 의해 신체의 통제권을 쥐었다 뺏겼다 하는 <문나이트>의 마크와, 제4의 벽을 넘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선택해낸 <변호사 쉬헐크> 속 제니퍼까지. 어쩌면 타인의 신체를 유폐시킨 뒤 그의 모습과 기억으로 삶을 대체하는 <시크릿 인베이젼>의 스크럴 종족 또한 자유의지의 박탈이라는 점에서 위의 사례들과 상통할 수 있으리라.

영화도 마찬가지다. <블랙 위도우>에서 드러난 드레이코프의 세뇌, 기억을 지우며 억겁의 시간 동안 이터널들을 이용한 셀레스티얼과 순종적 완전체를 만들기 위해 비윤리적 실험을 거듭해온 하이 에볼루셔너리 등등. 물론 인피니티 사가에서부터 윈터 솔져와 캡틴 마블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에게 이용당한 캐릭터들은 존재했지만, 멀티버스 사가에 들어서 해당 모티프의 빈도가 확연히 늘어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드라마 <로키> 시즌 2 스틸컷
ⓒ 디즈니플러스
그렇다면 그 이유와 목적은 대체 무엇일까. 마블은 어째서 이야기 속에 자유의지에 대한 담론을 담아온 걸까. 개인적으로 그것은 마블이 그리는 세계 속에 인지를 초월한 우주적 존재들이 실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운명론과 자유의지론의 대립이다. 멀티버스 사가에 들어서며 시간선 바깥의 존재들이 이야기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제까지의 이야기들에조차 우리가 아닌 그들의 의지가 다분히 개입되어왔음이 하나둘 밝혀졌다.

그것이 신이라 불리는 존재의 절대적 권능에 의해서든, 사고실험 속 라플라스의 악마처럼 과학을 통한 분석에 의해서든,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적 시각 앞에서 우리의 자유의지는 그 반짝이는 빛을 잃어버리고 만다. 어쩌면 우리 모두 팔과 다리에 실이 묶인 채 그저 저들이 흔드는 대로 춤을 추는 꼭두각시에 불과할지도 모르니까. 허무하고 우울한 이야기다. 노예제가 남아있던 19세기도, 프로파간다가 판을 치던 20세기도 아닌, 21세기의 자유시민인 내가 이 손 위의 자유를 의심해야 한다니.

물론 이는 화면 너머 영웅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다가온다. 이야기의 무대가 넓어질수록 초월적 존재들이 그 모습을 점점 더 많이 드러낼 테고, 그때마다 그들의 폭력 아닌 폭력에 영웅들은 선택을 강요받을 것이다. 자신을 따르라고. 다른 길은 없다고. 대의를 위한 일이라 포장하며 운명을 받아들이라 종용하겠지. 하지만 영웅들은 결코 의지를 굽히지 않을 것이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토니의 희생이 닥터 스트레인지가 본 미래대로 정해져 있었음에도, 그는 결코 도망치거나 체념하지 않고 끝까지 아이언맨으로서 자신의 선택에 따라 타노스에 맞서지 않았던가.
 
 드라마 <로키> 시즌 1 스틸컷
ⓒ 디즈니플러스
지금의 MCU는 캉 의회의 출현과 인커전의 발생 등 멀티버스적 위협을 앞에 두고 있다. 심지어 우주로 가기 전 당장 지구만 놓고 보더라도 영화 <이터널스>의 결말에서 아리솀의 심판까지 예고된 상황이다. 이러한 위기에 맞서 영웅들은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될까? 초월자의 말에 따라 정해진 운명을 묵묵히 따르게 될까. 무엇조차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며 그저 두 손을 놓아버리게 될까. 아니면 포기하지 않고 발버둥을 치며 단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 할까.

히어로든 빌런이든 그들 모두가 스스로 생각하고 자유로이 선택하게 된다면 세상에는 분명 전례 없는 혼돈이 닥쳐오게 될 테다. 하지만 제아무리 그곳이 혼돈이라 할지라도, 그 속은 필시 억압으로 유지되는 질서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조화로우리라. 결국 마블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설령 미래가 운명처럼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과 선택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외침이 아닐까. 그렇게 의지를 불태우며 자유를 되찾아, 보다 더 진보적인 세상으로 나아가자는 외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슈퍼히어로 장르에 철학적 물음을 가미하여 영화관 밖에서도 토론을 이어가게 했던 인피니티 사가처럼, 지금은 다소 흔들리고 있는 멀티버스 사가 역시 점점 자유의지에 대한 담론을 키워가며 스크린 안과 밖을 이어주리라 기대해 본다. 혼돈과 질서 중 어느 쪽이 더 정의로울지. 드라마 <로키>가 손에 쥔 이 배턴이 얼마나 더 커지고, 다음에는 누가 이를 이어받을지, 즐거운 상상을 해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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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전용준 시민기자의 개인 SNS와 브런치스토리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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