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만든 건 열등감" 44년 전성기 지춘희의 롱런 비결
■ Editor's Note
「 “나보다 더 잘하니까 거기에 나온 거 아니에요. 그걸 보는 게 힘들어요, 얼굴이 화끈거려서.”
1990년대에는 심은하, 이영애가 입은 ‘청담동 며느리룩으로, 2018년에는 CJ오쇼핑에 진출하며 연 매출 1000억원 브랜드를 만든 지춘희 디자이너. 1979년 ‘미스지컬렉션’을 론칭한 이래 40여년 간 전성기를 유지 중인 그는 예상 밖의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패션 잡지를 보지 않는다고요. 매년 쇼를 준비할 때마다 숙제하는 기분이라는 그에게 롱런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
※ 이 기사는 ‘성장의 경험을 나누는 콘텐트 구독 서비스’ 폴인(fol:in)의 ‘프로의 5가지 기술’의 5화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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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릇을 넘어설 생각은 안 했어요”
Q. 44년간 꾸준히 일하고 계십니다. 비결이 뭔가요?
어제는 일이 잘 안 풀렸어요. 인터뷰하는 것도 사실은 좀 걱정됐고요. 그래서 가만히 앉아 나는 어떤 생각을 하나, 써봤어요.
Q. 어떤 걸 쓰셨나요?
‘열등감’이요. 글자를 많이 흘려 썼지만요(웃음).
Q. 열등감이라니, 예상치 못한 단어예요.
그 생각이 저를 많이 만들었어요. 매년 쇼를 하잖아요. 1년에 두 번 컬렉션을 하면 사람들이 와서 칭찬해요. 잘 봤다, 저번보다 좋았다. 그러나 저 자신은 알죠, 내가 얼마나 모자란 지를요.
그러니까 매번 숙제하는 기분이에요. 공부도 왜 책상에 앉은 만큼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힘들어서 책상부터 닦고, 자꾸 엉뚱한 짓하고. 똑같아요. 일을 시작하기까지 워밍업 시간이 좀 들죠. 가만 보면 쇼 준비 기간에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더라고요, 제가(웃음).
Q.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다시 잘 해봐야지, 하는 거죠. 뭐 별 게 있나요? 다 내 능력껏 하는 거죠. 뛰어넘을 거면 넘는 거고, 못 뛰어넘으면 못 넘는 거고(웃음). 저는 너무 큰 욕심은 내지 않았어요.
" 하루하루 잘 사는 게 10년이 되고, 20년이 돼서 나를 만드는 거지. 너무 큰 욕심, 너무 큰 꿈은 글쎄요. " 웬만큼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본인을 힘들게 하면 가는 길이 너무 힘들잖아요. 10m도 안 뛰어본 사람이 어떻게 100m 뛸 걸 예상하겠어요? 한 스텝 한 스텝 올라가는 게 오히려 멀리 가기에는 빠른 길이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온 것 같아요.
Q. ‘더 큰 꿈을 꾸라’는 말도 있잖아요.
사람은 자기 그릇을 알아야 해요. 저도 내 그릇이 이만큼인데 그걸 넘어설 생각을 하지는 않았어요. 욕심내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나 그건 열아홉 때나 하는 거죠. 젊으면 시도해 보고 다시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저는 그럴 나이가 아니니까요.
“오래된 게 낡은 거라는 건 편견이에요”
Q. 일할 때는 어떤 태도를 가장 경계하나요?
부산스러운 것요. 하는 것 없이 동작만 큰 경우 있잖아요. 일할 때는 자기 정리를 좀 할 줄 알아야 해요. 혼자 일하는 거 아니고 다 협업해서 하는 거잖아요? 정리해야 일의 앞뒤를 아니까요.
그래서 뭔가를 늘어놓고 하는 사람 제일 싫어해요. 재료 찾으려면 한두 시간인데, 무슨 일을 하겠어요?
Q. 결정이 빠른 편이세요?
빠르죠. 그렇게 훈련이 됐어요. 봄가을마다 파리에서 열리는 원단 전시에 가거든요. 걸음이 빠르고 눈이 빠르지 않으면 원단 다 못 봐요. 수만 수천 벌이니까요. 그런데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이거 어때, 저거 어때?’ 그러면 일 못 하죠. 거의 날아다녀야 하고, 눈이 등 뒤에도 달려 있어야 해요(웃음).
Q. 리더로서는 어떠신지요.
엄격한 편이죠. 리더는 뭐가 되고 안 되고를 명확히 해줘야 하잖아요. 제일 나쁜 게 애매모호한 태도로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보다는 확실하게 선을 그어주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면 좋죠. 저는 그런 게 좋은데, 직원들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웃음)
Q. 롱런 비결이 궁금합니다.
저는 그런 질문을 자주 받는데요. 글쎄요. 이 사회, 시대에 함께 살고 있는데 일을 오래 하고 안 하고가 무슨 차이일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오래된 게 낡은 거라는 건 편견이에요. 물건은 오래 쓰면 낡지만, 우리는 물건이 아니니까요. 그 생각을 바꿔가며 늘 새로운 걸 해야죠.
Q. 일이 힘들었을 때는 없나요?
늘 버티기 힘들죠, 끊임없는 경쟁. 사실은 옷도 영화처럼 흥행의 영역이잖아요. 발표하기 6개월 전, 1년 전에 원단을 택해야 하고 옷을 만들어야 하고. 그런데 6개월 후에 이 주황색이 맞을지 안 맞을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결국 내가 정답을 가졌냐, 안 가졌냐는 사람들 호응도에 달린 거니까요.
그런데 저는 무슨 일이 생겨도 크게 고민은 안 해요. 일은 어려워도 해결할 수 있는 거니까요. 물론 스트레스는 늘 털려고 노력해요. '별거 아니다, 괜찮다' 자꾸 부정해도 마음에는 그게 남아 있더라고요. 그래서 힘들었던 적도 있어요, 사실은. 그러나 미주알고주알 남한테 이야기는 잘 안 하죠.
일이라는 게 그냥 눈 뜨면 하는 거지, 힘들다고 별수 있나요. 저한테 일하고 사는 건 내가 살아있는 거나 똑같아요. 아침밥을 먹는 거나, 일하러 나오는 거나 별다르지 않아요(웃음).
“더 용기 있게 일하는 것, 44년 전과 다른 점이죠”
Q. 사람들이 어떤 옷을 원하는지는 어떻게 아나요?
사람 마음을 잘 알아야죠. 남의 걸 자꾸 보기만 하면 눈치 보는 게 되고(웃음). 결국 제가 잘 살아야죠. 내 라이프를 잘 살면, 내가 터득하는 걸 남들도 원하지 않을까? 그래서 좀 부지런히 사는 편이에요.
Q. '내 삶을 잘 살아야 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유행이라는 게 결국 사람 마음이잖아요. 내가 원하는 것, 이렇게 바뀌길 바라는 것. 그러니까 내 삶을 잘 살면, 내가 원하는 걸 남들도 원하게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거죠.
예를 들어 코로나 초기에는 세상이 동맥경화처럼 막혀 있었잖아요. 움직일 수 없으니까. 그래서 저도 사는 데, 생활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썼어요. 그동안 미뤄둔 일들, 이를테면 빵도 만들어 보고, 고추장 된장도 한 번 담가보고(웃음). 그렇게 뭔가에 집중하며 나를 열심히 살아내면 얻어지는 것들이 있어요.
또 사회 돌아가는 걸 잘 알아야죠. 전쟁이 났다거나 하는 세계 소식에도 민감하지 않을 순 없죠. 이제는 시대가 많이 바뀌었지만, 저는 그동안 신문에 기대서 많이 터득한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온라인 기사도 잘 돼 있죠? (웃음)
Q. 디자이너님이 생각하는 패션의 정의가 궁금합니다.
" 살아가는 얘기죠. "
자기 기분에 오늘은 흰옷을 택할 수도 있고, 짧은 옷을 입을 수도 있고. 그게 유행이 되고. 다 같은 얘기예요. 살아가는 얘기, 라이프.
옛날에는 남성이 좀 더 결정하는 시대에 살았죠. 그때는 패션을 조금 경원시하고, 여자의 허영과 연결 짓는 풍토가 있었어요. 그러나 패션은 그런 게 아니에요. 생활 자체가 사실은 패션이죠. 그다음 날 아침에 기분 따라 넥타이 골라 매는 게 패션이지, 별다른 게 있나요? (웃음)
Q. 백화점 판매를 고집하다 2018년 홈쇼핑(CJ오쇼핑)에도 진출했습니다. 브랜드 출시 1년 만에 연 매출 1000억원을 돌파했죠.
그전에는 유통 구조가 다 백화점에 매달려 있었어요. 세컨더리 브랜드도 해야 하는데, 그게 다 인력이잖아요. 누군가는 영업, 기획을 해줘야 하니까요. 사실 홈쇼핑 권유를 꽤 오래전부터 받았는데요. 근 몇십 년을 고민했어요.
결과적으로 잘했다고 봐요. 왜냐하면 옷은 다수가 입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많은 사람이 입어주는 거, 호응해 주는 것. 이것도 참 좋아요.
Q. 1979년 미스지컬렉션 론칭 당시와 지금을 돌아보면 어떤 점이 가장 달라졌나요.
더 용기 있는 거죠. 예전보다는 덜 두려움을 갖고 일하는 것.
그다음은 좋은 선배가 옆에 있는 거죠. 가까이하는 분 중 저보다 나이가 5, 10년 정도 높은 분들이 있어요. 1년에 한두 번씩 함께 여행을 가는데, 늘 놀라워요. 데스밸리를 모험심으로 가보는 분들이거든요. 새벽 4시 반에는 내 방문을 발로 뻥 차요. 빨리 나오라고(웃음). 그 체력이나 용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거기서는 내가 제일 여리여리하고 귀여움 받는다니까요(웃음).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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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롱런_지춘희 디자이너 "나를 만든 건 열등감"
」
김다희 에디터 kim.dahee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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