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만든 건 열등감" 44년 전성기 지춘희의 롱런 비결

폴인 2023. 10. 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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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itor's Note

「 “나보다 더 잘하니까 거기에 나온 거 아니에요. 그걸 보는 게 힘들어요, 얼굴이 화끈거려서.”

1990년대에는 심은하, 이영애가 입은 ‘청담동 며느리룩으로, 2018년에는 CJ오쇼핑에 진출하며 연 매출 1000억원 브랜드를 만든 지춘희 디자이너. 1979년 ‘미스지컬렉션’을 론칭한 이래 40여년 간 전성기를 유지 중인 그는 예상 밖의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패션 잡지를 보지 않는다고요. 매년 쇼를 준비할 때마다 숙제하는 기분이라는 그에게 롱런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 이 기사는 ‘성장의 경험을 나누는 콘텐트 구독 서비스’ 폴인(fol:in)의 ‘프로의 5가지 기술’의 5화 중 일부입니다.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 '미스지컬렉션' 사무실에서 만난 지춘희 디자이너. 사진 폴인, 최지훈


“내 그릇을 넘어설 생각은 안 했어요”

Q. 44년간 꾸준히 일하고 계십니다. 비결이 뭔가요?

어제는 일이 잘 안 풀렸어요. 인터뷰하는 것도 사실은 좀 걱정됐고요. 그래서 가만히 앉아 나는 어떤 생각을 하나, 써봤어요.

Q. 어떤 걸 쓰셨나요?

‘열등감’이요. 글자를 많이 흘려 썼지만요(웃음).

Q. 열등감이라니, 예상치 못한 단어예요.

그 생각이 저를 많이 만들었어요. 매년 쇼를 하잖아요. 1년에 두 번 컬렉션을 하면 사람들이 와서 칭찬해요. 잘 봤다, 저번보다 좋았다. 그러나 저 자신은 알죠, 내가 얼마나 모자란 지를요.

그러니까 매번 숙제하는 기분이에요. 공부도 왜 책상에 앉은 만큼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힘들어서 책상부터 닦고, 자꾸 엉뚱한 짓하고. 똑같아요. 일을 시작하기까지 워밍업 시간이 좀 들죠. 가만 보면 쇼 준비 기간에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더라고요, 제가(웃음).

"열등감이 저를 만든 8할이죠." 사진 폴인, 최지훈


Q.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다시 잘 해봐야지, 하는 거죠. 뭐 별 게 있나요? 다 내 능력껏 하는 거죠. 뛰어넘을 거면 넘는 거고, 못 뛰어넘으면 못 넘는 거고(웃음). 저는 너무 큰 욕심은 내지 않았어요.
" 하루하루 잘 사는 게 10년이 되고, 20년이 돼서 나를 만드는 거지. 너무 큰 욕심, 너무 큰 꿈은 글쎄요. " 웬만큼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본인을 힘들게 하면 가는 길이 너무 힘들잖아요. 10m도 안 뛰어본 사람이 어떻게 100m 뛸 걸 예상하겠어요? 한 스텝 한 스텝 올라가는 게 오히려 멀리 가기에는 빠른 길이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온 것 같아요.

Q. ‘더 큰 꿈을 꾸라’는 말도 있잖아요.

사람은 자기 그릇을 알아야 해요. 저도 내 그릇이 이만큼인데 그걸 넘어설 생각을 하지는 않았어요. 욕심내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나 그건 열아홉 때나 하는 거죠. 젊으면 시도해 보고 다시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저는 그럴 나이가 아니니까요.


“오래된 게 낡은 거라는 건 편견이에요”

Q. 일할 때는 어떤 태도를 가장 경계하나요?

부산스러운 것요. 하는 것 없이 동작만 큰 경우 있잖아요. 일할 때는 자기 정리를 좀 할 줄 알아야 해요. 혼자 일하는 거 아니고 다 협업해서 하는 거잖아요? 정리해야 일의 앞뒤를 아니까요.

그래서 뭔가를 늘어놓고 하는 사람 제일 싫어해요. 재료 찾으려면 한두 시간인데, 무슨 일을 하겠어요?

"일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정리'예요." 사진 폴인, 최지훈

Q. 결정이 빠른 편이세요?

빠르죠. 그렇게 훈련이 됐어요. 봄가을마다 파리에서 열리는 원단 전시에 가거든요. 걸음이 빠르고 눈이 빠르지 않으면 원단 다 못 봐요. 수만 수천 벌이니까요. 그런데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이거 어때, 저거 어때?’ 그러면 일 못 하죠. 거의 날아다녀야 하고, 눈이 등 뒤에도 달려 있어야 해요(웃음).

Q. 리더로서는 어떠신지요.

엄격한 편이죠. 리더는 뭐가 되고 안 되고를 명확히 해줘야 하잖아요. 제일 나쁜 게 애매모호한 태도로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보다는 확실하게 선을 그어주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면 좋죠. 저는 그런 게 좋은데, 직원들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웃음)

Q. 롱런 비결이 궁금합니다.

저는 그런 질문을 자주 받는데요. 글쎄요. 이 사회, 시대에 함께 살고 있는데 일을 오래 하고 안 하고가 무슨 차이일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오래된 게 낡은 거라는 건 편견이에요. 물건은 오래 쓰면 낡지만, 우리는 물건이 아니니까요. 그 생각을 바꿔가며 늘 새로운 걸 해야죠.

"너무 큰 욕심은 내지 않았어요. 하루하루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왔을 뿐이죠." 사진 폴인, 최지훈

Q. 일이 힘들었을 때는 없나요?

늘 버티기 힘들죠, 끊임없는 경쟁. 사실은 옷도 영화처럼 흥행의 영역이잖아요. 발표하기 6개월 전, 1년 전에 원단을 택해야 하고 옷을 만들어야 하고. 그런데 6개월 후에 이 주황색이 맞을지 안 맞을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결국 내가 정답을 가졌냐, 안 가졌냐는 사람들 호응도에 달린 거니까요.

그런데 저는 무슨 일이 생겨도 크게 고민은 안 해요. 일은 어려워도 해결할 수 있는 거니까요. 물론 스트레스는 늘 털려고 노력해요. '별거 아니다, 괜찮다' 자꾸 부정해도 마음에는 그게 남아 있더라고요. 그래서 힘들었던 적도 있어요, 사실은. 그러나 미주알고주알 남한테 이야기는 잘 안 하죠.

일이라는 게 그냥 눈 뜨면 하는 거지, 힘들다고 별수 있나요. 저한테 일하고 사는 건 내가 살아있는 거나 똑같아요. 아침밥을 먹는 거나, 일하러 나오는 거나 별다르지 않아요(웃음).


“더 용기 있게 일하는 것, 44년 전과 다른 점이죠”

Q. 사람들이 어떤 옷을 원하는지는 어떻게 아나요?

사람 마음을 잘 알아야죠. 남의 걸 자꾸 보기만 하면 눈치 보는 게 되고(웃음). 결국 제가 잘 살아야죠. 내 라이프를 잘 살면, 내가 터득하는 걸 남들도 원하지 않을까? 그래서 좀 부지런히 사는 편이에요.

Q. '내 삶을 잘 살아야 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유행이라는 게 결국 사람 마음이잖아요. 내가 원하는 것, 이렇게 바뀌길 바라는 것. 그러니까 내 삶을 잘 살면, 내가 원하는 걸 남들도 원하게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거죠.

예를 들어 코로나 초기에는 세상이 동맥경화처럼 막혀 있었잖아요. 움직일 수 없으니까. 그래서 저도 사는 데, 생활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썼어요. 그동안 미뤄둔 일들, 이를테면 빵도 만들어 보고, 고추장 된장도 한 번 담가보고(웃음). 그렇게 뭔가에 집중하며 나를 열심히 살아내면 얻어지는 것들이 있어요.

코로나 시기에는 직접 효모를 키워 빵을 구웠다는 지춘희 디자이너. 사진 폴인, 최지훈

또 사회 돌아가는 걸 잘 알아야죠. 전쟁이 났다거나 하는 세계 소식에도 민감하지 않을 순 없죠. 이제는 시대가 많이 바뀌었지만, 저는 그동안 신문에 기대서 많이 터득한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온라인 기사도 잘 돼 있죠? (웃음)

Q. 디자이너님이 생각하는 패션의 정의가 궁금합니다.

" 살아가는 얘기죠. "
자기 기분에 오늘은 흰옷을 택할 수도 있고, 짧은 옷을 입을 수도 있고. 그게 유행이 되고. 다 같은 얘기예요. 살아가는 얘기, 라이프.

옛날에는 남성이 좀 더 결정하는 시대에 살았죠. 그때는 패션을 조금 경원시하고, 여자의 허영과 연결 짓는 풍토가 있었어요. 그러나 패션은 그런 게 아니에요. 생활 자체가 사실은 패션이죠. 그다음 날 아침에 기분 따라 넥타이 골라 매는 게 패션이지, 별다른 게 있나요? (웃음)

"패션은 사실 누구나 매일 하는 건데, 그걸 무시하는 것 같아요." 사진 폴인, 최지훈

Q. 백화점 판매를 고집하다 2018년 홈쇼핑(CJ오쇼핑)에도 진출했습니다. 브랜드 출시 1년 만에 연 매출 1000억원을 돌파했죠.

그전에는 유통 구조가 다 백화점에 매달려 있었어요. 세컨더리 브랜드도 해야 하는데, 그게 다 인력이잖아요. 누군가는 영업, 기획을 해줘야 하니까요. 사실 홈쇼핑 권유를 꽤 오래전부터 받았는데요. 근 몇십 년을 고민했어요.

결과적으로 잘했다고 봐요. 왜냐하면 옷은 다수가 입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많은 사람이 입어주는 거, 호응해 주는 것. 이것도 참 좋아요.

Q. 1979년 미스지컬렉션 론칭 당시와 지금을 돌아보면 어떤 점이 가장 달라졌나요.

더 용기 있는 거죠. 예전보다는 덜 두려움을 갖고 일하는 것.

그다음은 좋은 선배가 옆에 있는 거죠. 가까이하는 분 중 저보다 나이가 5, 10년 정도 높은 분들이 있어요. 1년에 한두 번씩 함께 여행을 가는데, 늘 놀라워요. 데스밸리를 모험심으로 가보는 분들이거든요. 새벽 4시 반에는 내 방문을 발로 뻥 차요. 빨리 나오라고(웃음). 그 체력이나 용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거기서는 내가 제일 여리여리하고 귀여움 받는다니까요(웃음).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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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희 에디터 kim.dahee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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