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땅 두개의 나라 피의 전쟁이 시작됐다

신창호 2023. 10. 21.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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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100년史
英 ‘밸푸어 선언’ 유대인 대규모 이주
밀려난 아랍인 무장투쟁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대규모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이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으로 구약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간 피로 얼룩진 역사가 다시 조명받고 있다. 두 집단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팔레스타인 내부의 강경파 대 온건파 갈등, 이란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등 주변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진영이 서로 뒤엉킨 현대사는 이번 전쟁이 쉽게 진정되지 않을 것임을 대변한다.

100년 전 시작된 이·팔 갈등

불구대천의 원수인 두 민족의 ‘현대적 대립’은 1917년 유럽 각지를 떠돌던 유대인들이 국가 건설 운동을 일으키면서 시작됐다. 유대인 갑부 로스차일드 가문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 막대한 전쟁자금을 지원한 대가로 오스만튀르크 제국 지배하에 있던 팔레스타인 반도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한다는 내용의 ‘밸푸어 선언’을 이끌어냈다. 이때부터 수만명의 유대인이 지금의 이스라엘 땅으로 건너가기 시작했고, 팔레스타인인들과의 갈등이 시작됐다.

막대한 부를 갖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과 텔아비브의 토지를 사들이면서 팔레스타인인은 점점 더 요르단 방면의 동쪽, 이집트 방면의 남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1930년대가 되자 지중해 연안의 반도 서쪽은 유대인이 거주자의 다수를 이루는 지역으로 변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자행되면서 한동안 유대인 국가 건설 운동은 중단됐다. 하지만 47년 유엔 중재로 유대인 66%, 팔레스타인 44% 토지분할안이 단행됐고 48년 마침내 이스라엘이 건국됐다.

하루아침에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인들은 요르단 이집트 등 주변 아랍국가들과 함께 1차 중동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쟁은 미국 영국 등 서방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고 이스라엘의 영토는 더욱 확장됐다.

지중해 연안 텔아비브와 그 일대만 차지했던 이스라엘은 50·60·70년대 2차·3차·4차 중동전쟁을 치르며 현재의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로까지 영토를 넓혔다. 현재 이스라엘 토지는 이스라엘인이 78%, 팔레스타인인이 22%를 소유하고 있지만 팔레스타인인의 소유지는 자연환경이 열악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로 한정된다.


PLO의 등장… 세계의 화약고로

2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팔레스타인인 상당수는 이스라엘 땅에서 쫓겨나 이집트 요르단 등지를 전전하는 난민으로 전락했다. 이스라엘은 국내에 남아있던 소수의 팔레스타인인에게만 시민권을 부여했고, 쫓아낸 이들에겐 국적조차 주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해외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 운동에 나섰다. 군사 강국 이스라엘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처지가 열악했던 이들에게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라는 강력한 조직이 등장했다. 세속주의 이슬람세력과 사회주의 계열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조직한 이 단체는 옛 소련과 이집트, 요르단 등의 지원을 받아 게릴라전, 인질극, 테러 등을 했다. 72년 뮌헨올림픽 이스라엘 선수단 테러 사건이 대표적이다.

수니파 이슬람이었지만 세속주의와 사회주의에 경도됐던 PLO는 시아파인 시리아 정권, 레바논 과격 무장세력 헤즈볼라 등으로부터도 지원을 받았다.

70년대 4차 중동전쟁 여파로 ‘오일 쇼크’가 발생하자 미국이 개입했고 이때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반도는 중동을 넘어 세계 각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화약고로 변모했다.

하지만 79년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캠프데이비드 협정)에 서명한 뒤 이집트 내 활동을 금지하자 PLO는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93년 오슬로협정을 통해 이스라엘과 PLO 간 평화가 약속됐으며,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끄는 PLO는 90년대부터 파타당으로 변신해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자치권을 행사해 왔다.

물 건너간 평화… 하마스의 등장

2006년 유엔 감시하에 실시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에서 서안지구는 파타당이,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1위를 차지했다. 총득표율에서 파타당이 앞섰기 때문에 당연히 파타당이 집권해야 했지만 하마스는 가자지구를 내주지 않았다. 두 정파는 출발부터 목표까지 전혀 다른 노선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타당은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당시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 사이에 맺어졌던 오슬로 협정을 ‘양국 방안’으로 해석하는 온건민족주의 정파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를 통합해 팔레스타인 정부를 세우고 유엔에서 승인받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반면 하마스는 강경한 일국주의를 표방한다. 팔레스타인 반도에서 이스라엘 정부는 물론 유대인 전부를 쫓아내고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고자 한다. 정교일치를 주창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기도 하다.

양측은 서로 간의 무장투쟁도 불사할 만큼 비타협적이다. 가자지구를 거점으로 삼는 하마스가 서안지구로 세력을 확대하려 하자 파타당은 자치경찰 등을 동원해 소탕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극우 유대 민족주의 VS 이슬람 원리주의
로이터연합뉴스

하마스는 2006년 집권 시 득표율에서 파타당을 간신히 이긴 뒤 지금까지 가자지구에서 독재 정치를 펼쳐 왔다. 이동조차 허가를 받아야 해 가자지구 주민들은 하마스 대원들 앞에서 숨죽여 지낸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반도에서 유대인을 몰살하기 위해선 모든 방법이 정당화된다는 극단적 주장도 공공연하게 펼친다. 자살 테러, 민간인 살해·납치도 이들에겐 범죄가 아닌 이슬람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기 위한 ‘성전’으로 여겨진다.

하마스의 행태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극우 연정이 출범한 뒤 더욱 극렬해지는 양상이다. 연정이 유대인 우월주의, 유대교 근본주의자 정당까지 아우르고 있어서다. 이들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자치권조차 인정하지 않는 데다 ‘최종 목표는 팔레스타인인 전체의 절멸’이라고 밝힐 정도로 과격하다.

이번 전쟁이 ‘유대인 일국주의’와 ‘팔레스타인 일국주의’의 극한대결로 치달을 것이란 예측이 나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신창호 선임기자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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