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로이트를 구한 영웅’ 사무엘 윤 “좋은 스승이자 멘토 되고 싶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예술 행사이자 전 세계 바그네리안(바그너 숭배자)의 성지다. 지난 2012년 페스티벌의 개막작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타이틀롤은 한국 출신 베이스 바리톤 사무엘 윤(52·본명 윤태현)에게 돌아갔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바이로이트에서 아시아 성악가가 처음으로 주인공을 맡은 만큼 큰 화제를 모았다.
쾰른 오페라극장 전속 솔리스트였던 사무엘 윤은 2004년부터 꾸준히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무대에 섰다. 2012년 ‘로엔그린’의 헤어루퍼 역으로 출연하기 위해 바이로이트에 있던 그는 페스티벌 개막을 나흘 앞두고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주인공인 네덜란드인 선장으로 캐스팅됐다. 당시 그 역할을 맡았던 성악가가 나치 문양 문신 때문에 도중 하차하면서 그가 대타로 나서게 된 것이다.
갑작스러운 캐스팅에 놀라긴 했지만,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캐스팅 전화를 받은 그는 5시간 뒤 열린 최종 리허설에서 훌륭하게 역할을 소화하며 축제 관계자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개막 이후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로엔그린’의 무대에 각각 6회씩 출연한 그에게는 ‘바이로이트를 구한 영웅’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니게 됐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2014년까지 3년간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주역으로 출연하는 등 바그너 가수로 입지를 굳힌 사무엘 윤에게는 전 세계 오페라극장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그리고 2015년 쾰른 오페라극장 종신 단원이 된 그는 지난해엔 독일어권 성악가 최고 영예인 ‘궁정가수(Kammersaenger·카머쟁어)’ 칭호까지 받았다. 궁정가수는 뛰어난 성과를 거둔 기리기 위해 독일 주 정부에서 수여하는 칭호다. 한국인으로는 2011년 소프라노 헬렌 권, 2011년 베이스 전승현, 2018년 베이스 연광철에 이어 네 번째다.
올해는 그가 국제무대에 데뷔한 지 25주년이 되는 해다. 오는 2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기념 콘서트 ‘From Darkness To Light(어둠에서 빛으로)’를 앞둔 그를 최근 만나 그동안의 소회와 함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
“저는 어릴 때부터 남들 앞에서 노래하는 걸 좋아했어요. 하지만 성악가가 되어 이렇게 25주년 기념공연까지 할 거라고는 예상 못 했습니다. 늦게 성악을 시작했지만, 무대에서 단역부터 차근차근 나만의 역할을 만들어온 덕분인 것 같아요.”
성악가로서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지만, 그는 적지 않은 시간 자신의 가능성을 의심했다. 고등학교 3학년 가을에야 성악을 진로로 잡은 그는 서울대 입학에는 성공했지만, 동기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주눅이 들었다. 재학 시절 그가 학군사관후보생(ROTC)을 택한 것도 콩쿠르 수상에 따른 병역면제 가능성을 크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성장을 기다려준 스승 이인영 서울대 교수 덕분에 도약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저는 1년에 3~4번밖에 지도교수를 찾아가지 않는 불성실한 제자였어요. 다른 교수님이셨다면 클래스에서 내보냈겠지만, 이인영 선생님은 그러질 않으셨죠. 그러다가 4학년 1학기 때 제가 선생님께 말씀도 드리지 않고 중앙음악콩쿠르에 나갔는데, 운 좋게 본선까지 진출한 거예요. 당시 이인영 선생님이 ‘레슨 받고 본선 나가라’며 먼저 연락을 주셨습니다. 그때 테크닉을 비롯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진정한 의미의 첫 성악 레슨이었죠.”
이인영 교수의 특별 레슨을 받고 출전한 중앙음악콩쿠르에서 그는 우승(1위 없는 2위)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성악 명문인 이탈리아 밀라노 베르디 국립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유학 시절 초기에 10여 개 콩쿠르에서 줄줄이 탈락하며 다시 한번 자신의 재능을 고민했다. 당시 한국의 외환위기로 경제적 어려움마저 겪었지만, 신앙심과 아내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던 그에게 전환점이 된 것은 1998년 이탈리아 토티 달 몬테 콩쿠르 우승이다.
“토티 달 몬테 콩쿠르는 아리아를 겨루는 여느 콩쿠르와 달리 오페라 배역을 선발해 실제 공연을 하는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당시 구노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 역으로 우승한 덕분에 같은 해 이탈리아 트레비조 극장에서 데뷔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콩쿠르에서 저를 눈여겨본 쾰른 오페라극장장이 이듬해 오디션 참가 기회를 주면서 독일로 옮기게 된 거예요.”
1999년 쾰른 오페라극장의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 ‘쾰른 오펀 스튜디오’에 합격한 그는 이듬해 전속 솔리스트가 됐다. 그의 예명인 ‘사무엘 윤’을 지은 것이나 트레이드마크인 꽁지머리와 수염을 기른 것도 쾰른에 와서다. ‘제2의 고향’인 쾰른에서 종신 단원이 될 만큼 탄탄한 입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는 지난해 모교인 서울대 교수로 한국에 돌아왔다.
“독일 오페라극장의 종신 단원은 65세까지 정년이 보장되면서 해외 활동도 이어갈 수 있는 자리입니다. 하지만 50세가 넘으니 제가 주인공이 되어 돋보이는 삶보다 누군가에게 ‘쓰임 받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특히 한국의 젊은 성악가들에게 도움 되는 존재가 되고 싶었어요. 예전의 이인영 선생님이 제게 해주셨던 것처럼요. 그리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과 함께 한국의 클래식 음악 환경을 바꾸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지금보다 많은 사람이 오페라나 가곡을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청중과 공유하지 않는 음악은 희망이 없으니까요.”
그는 쾰른 오페라극장 솔리스트 시절부터 다른 도시에 갈 때마다 한국인 유학생들을 상대로 마스터 클래스를 여는 등 멘토 역할을 열심히 해왔다. 그 자신이 유학 시절 힘든 시간을 보낸 만큼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2015년부터는 쾰른 오페라극장과 협의하고 김영호 일신방직 회장의 후원을 받아 오펀 스튜디오에서 활동할 한국인 성악가를 마스터 클래스에서 선발하고 있다. 하지만 근래 많은 성악도들이 TV 예능 프로그램 ‘팬텀싱어’로 이름을 알리는 한편 크로스오버나 뮤지컬 등의 진로를 선택하고 있다.
“요즘 젊은 성악가들이 음악에 집중하기 어려운 것은 분명해요. 유튜브 등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되면서 조급해지기 쉬우니까요. 저는 후배들에게 자신을 멀리서 바라보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늘 말합니다. 오페라나 가곡에 대한 사랑으로 성악을 선택한 학생이라면 기다림을 권유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선택한 길로 보내줘야죠.”
한편 이번 25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그는 1부를 슈베르트와 브람스의 가곡들로 채울 예정이다. 그리고 2부에선 바그너, 베버, 구노, 도니제티의 오페라 아리아들을 부른다. 이발사 피가로, 약장수 둘카마라, 신들의 왕 보탄, 악마 메피스토펠레 등 다양한 캐릭터들로 변신하는 그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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