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연의 K컬처] “불신의 도시에 기회와 경제적 자유가 넘치는 이유”

2023. 10. 21.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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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거티브에 민감한 한국문화 ④ 공문서
김치, 강남스타일, BTS, 영화 기생충 등 일과성 이벤트들에 머물렀던 세계의 관심이 이제 한국문화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K컬처로 대변되는 국내외의 다양한 사회현상들, 그리고 그들의 명과 암을 사회과학적으로 관찰하고 반추해 봄으로써 한국문화의 본성을 재조명해본다.

게티이미지뱅크

미국 캠퍼스 일자리에 지원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학력과 연구·강의 경력, 최근에 출판된 논문 리스트 등을 담은 이력서, 내가 왜 이 포지션에 적합한지를 설명하는 짧은 편지 한 통과 함께 이메일로 보내면 된다. 여기에 공동연구 등을 통해 나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이들 두세 명이 따로 추천서를 보내면 그것으로 서류제출은 끝이다. 한국인의 눈에 이러한 지원과정은 참으로 순진하기 짝이 없다. 지원자 자신이 작성한 서류와 추천서만으로 지원서에 적힌 내용을 어찌 그대로 믿을 수 있으랴. 그래서 그런지 한국의 지원절차는 지루할 정도로 까다롭다.

우선 이력서부터 다르다. 직무 능력과 관련된 정보 이외에 나의 얼굴과 주민등록번호, 때로는 가족관계까지 적어야 한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했던가. 외모는 기본이다. 필요하다면 스튜디오 실장님이나 포토샵의 도움을 받는다. 출판물 역시 학교가 운영하는 온라인 지원 시스템에 주어진 형식대로 입력하게 되어 있다. 입력된 정보는 데이터베이스에 확인을 거쳐, 해당 출판물의 종류와 게재된 저널의 순위 등에 따라 점수로 환산되어 나온다. 내 십여 년간의 삶이 탈탈 털려 숫자 하나로 내뱉어지는 순간 묘하게 다가왔던 초라함과 허무함은 겪어본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추천서 따위도 필요 없다. 능력도 없는 지원자가 인맥을 동원해 자리에 오르게 놔둬서는 안 된다. 지원자를 합격시키기 위해 추천인이 그(녀)의 능력이나 업적을 과대포장 했을 수도 있으니 신뢰할 수 없다. 추천인들과 친분이 있는 내부자들의 입김도 ‘형식상’ 차단할 수 있다. 편지글을 바탕으로 지원자의 능력을 수치화하는 작업에도 평가자의 주관성이 개입될 것이므로 이는 배제되어야 마땅하다.

한국의 평가체계는 인간의 주관적 개입에 극도로 민감한 듯 보이며, 이는 타인에 대한 한국인의 불신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28개 주요 국가에 거주하는 약 3만2000여명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사회일반(정부와 기업, 비영리단체, 그리고 미디어 등이 포함)에 대한 신뢰도(100점에 가까울수록 신뢰도가 높음)를 조사한 2023년 에델만(Edelman)의 글로벌 리포트를 보자. 한국의 평균점수는 36점으로 최하위를 기록 중이다. 2022년에는 일본 덕분에 꼴찌를 간신히 면했다.


하루하루 불신지옥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를 슬픈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까. 차트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믿음이 가득한 나라들(푸른색)은 한국에 비해 경제 규모가 작거나 법치주의가 덜 성숙한 곳이 대부분이다. 중국과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케냐 등이 특히 눈에 띈다. 한국과 함께 하위에 랭크된 나라들(붉은색)을 보면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스페인과 아르헨티나 정도를 제외하면 호주와 아일랜드, 미국, 독일, 영국 등 선진국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다. 중간지대(회색)를 이루고 있는 네덜란드나 캐나다의 신뢰도 역시 중립점수인 50점을 조금 넘겼을 뿐이다.

이에 우리는 ‘불신이 깊을수록 그 나라는 (대체로) 잘 사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불신의 근원과 선진국이 보편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시스템에서 이에 대한 답을 찾아보자. 한국 사회가 과거 학력 위조를 위시한 공인(公人)의 계속되는 거짓말에 시달려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허나 현재의 불신은 한국의 도시화와 이에 따른 인구구조의 변화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시골의 작은 공동체 사회에서 누군가를 믿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상대는 대부분 나와 친구이거나, 가족이나 지인 몇 명만 건너면 알 수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타이트한 인맥으로 서로 얽혀있는 사회에서는 여간해서는 상대를 기만하기 어려우며, 꼭 그래야 한다면 다음 날 야반도주를 계산에 넣어야 한다.

도시를 구성하는 인구의 성격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이제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가까운 사람들과 작별하고, 오직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이들과 더 의미 있는 만남과 소통을 유지한다. 내 옆집에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필요는 없다. 다만 나의 능력이나 상품에 대한 수요가 있다면 누구와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 매일 함께 일하던 동료나 사업 파트너는 언제든, 어떤 이유로든 바뀔 수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익숙함이 주던 편안함이 사라져 잠시 불편하겠지만, 이내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 관계를 맺으며 삶을 이어간다.

지인보다 타인이 수백, 수천 배 많은 도시에서 누구를 믿겠는가. 타인에 대한 일반화된 불신은 도시화의 불가피한 부산물이다. 그렇다면 불신에 가득 찬 타인 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처음 마주하는 상대방을 믿지 못한다. 다만 그(녀)와 함께 작성한 차가운 계약서와 그를 둘러싼 문서들의 법적 효력을 믿을 뿐이다. 법치(Rule of Law)에 대한 신뢰가 깊을수록 타인 간 자발적으로 맺어지는 뜨거운 관계의 수는 늘어나고, 그만큼 자유시장의 크기는 팽창한다.


공문서의 발행과 회전 그리고 다양한 행정 서비스가 어디서든 거의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한국에서 그 속도는 특히 더 빠를 것 같다. 아래 헤리티지 재단에서 2023년 발표한 ‘국가별 경제적 자유도 점수표’가 이를 증명한다. 경제적 자유도에 포함되는 주요 지수 중 하나가 개인 간 계약에 대한 법적 구속력에 대한 신뢰인데, 여기서 한국은 총점 73.7점으로 총 183개국 중 15위를 차지했다. 그 범위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으로 좁혀봐도 여전히 12위. 유럽 선진국과 비교해 크게 뒤지지 않는다. 독일과 캐나다, 영국, 미국, 벨기에, 일본 모두 우리 아래에 있다. 도시화가 가져다준 것은 타인이나 사회에 대한 추상적 불신만이 아니다. 도시의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 발생하는 법치, 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타인과의 새로운 만남과 기회의 폭발이 그 이면을 밝게 비춘다. 불혹의 나이에 내가 미국 소도시에서 어렵사리 서울행을 택한 이유가 아마 이것이었던 것 같다. 기회의 땅, 불신의 서울.

김상연 광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겸 한국문화데이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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