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로 먹고살기] ‘키스마크’가 있는 글

2023. 10. 21.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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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성준 작가


광고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할 때 PD나 디자이너에게 가장 많이 듣던 소리는 “카피 내용은 참 좋은데 말이야, 조금만 더 짧아질 순 없을까?”라는 부탁이었다. TV 광고는 15초니 30초, 라디오 광고는 20초 안에 내용을 다 전달하고 소비자들의 피드백까지 얻어내야 하기에 중언부언 길게 얘기할 수가 없다. 인쇄 광고도 마찬가지였다. 아트디렉터들은 대부분 깔끔한 걸 좋아하는 성격이므로 지면이 넓고 레이아웃이 간소해도 카피는 아주 짧고 작게 처리하기 마련이었다. 그래야 ‘여백의 미’가 산다는 것이다. 자연히 메시지를 압축해 짧고 강렬한 카피를 만들어낼 줄 아는 카피라이터가 동료들의 환영을 받았다.

카피라이터를 그만두고 작가가 되면서 ‘이제는 무슨 얘기든 내 마음대로 원 없이 길게 써도 되겠구나’라는 허황된 생각도 잠깐 해봤으나 막상 책을 내고 글쓰기 강연을 해보니 그건 착각이었다. 지면이 한정돼 있어 그런 게 아니라 이상하게 사람들은 짧은 글을 좋아했다. 내가 낸 책에서도 힘주어 썼던 긴 글보다는 장난처럼 쓴 몇 줄 안 되는 글이 더 인기가 좋았다. 예를 들어 회사를 그만두는 이유를 자동차 운전에 비유해 장황하게 쓴 산문보다는 ‘회사를 그만두고 비 오는 날 집에서 혼자 책을 읽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회사를 그만두었다. 마침 비가 온다. 책을 읽는다’라는 짧은 글에 공감하는 독자가 훨씬 많았다. 심지어 이걸 읽고 수십년 만에 전화를 걸어온 고등학교 동창도 있었다. 대기업에 다니던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성준아. 난 니가 세상에서 제일 부럽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현상임을 직감한 나는 심통이 나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부러우면 너도 회사를 그만두든가.”

지난주엔 경기도 한 공공기관에 가서 홍보자료를 주로 쓰는 전문가들을 앉혀 놓고 글쓰기 강연을 했다. 나는 카피라이터 시절 내 별명이 ‘반성문 전문 카피라이터’일 정도로 사과문을 자주, 잘 썼다는 우스갯소리로 강연을 시작했다. 기업이나 공공기관 홍보팀에서는 위기관리 일환으로 사과문을 쓸 일이 종종 생긴다. 사과문은 잘못한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정중히 사과한 뒤 구체적인 재발 방지 방안까지 확실하게 제시할 때 비로소 소비자의 마음이 움직인다. 하지만 내가 그때 쓴 사과문들은 오히려 ‘기술적으로 두리뭉실하게’ 썼기에 뽑힌 글이었다.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기 싫은 대기업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이다. 나는 사과문이 아니라 오히려 기업과 고객 간 소통을 가로막는 글을 썼던 어두운 과거를 반성하며 말과 글로 이뤄진 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즘은 보고서든 홍보물이든 긴 글을 읽는 사람이 없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모바일 중심으로 변한 매체 환경 탓이기도 하다. 그래서 보고서도 되도록 짧고 간결하게 써야 하고 결론부터 얘기하는 두괄식으로 써야 읽힌다. 실제로 모바일 배달앱을 개발하는 한 벤처기업에서 만우절에 축구공을 나눠주자는 행사 기획을 한 적이 있는데 기획서가 딱 한 장짜리였다. A4지에 축구공을 그려 넣고 ‘뻥’이라고 쓴 뒤 ‘만우절에 축구공을 나눠 줍시다’라고 쓴 게 전부였다. 뻥이라는 의성어와 거짓말을 해도 용인되는 만우절의 공통점만 재치 있게 살린 기획서였다. 사실 좋은 아이디어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알아본다. 길게 얘기하면 오히려 식상해진다.

제임스 카메론이 영화 ‘아바타’ 제작발표회를 하면서 했던 피칭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영화는 그가 ‘타이타닉’을 만들기 전부터 구상했던 이야기인데 우주와 해병대, 토속신앙과 자연보호에 대한 메시지, 공룡까지 뒤섞여 있는지라 한마디로 간단히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 “‘포카혼타스’와 ‘늑대와 춤을’, 그리고 ‘푸른 골짜기’가 섞인 영화입니다”라고 말했다가 투자자들의 냉담한 반응을 보고 말을 바꿨다. “한마디로 우주에서 벌어지는 ‘쥬라기 공원’이죠!” 이 말을 들은 투자자들은 그제야 얼굴이 밝아지며 빨리 영화를 만들자고 재촉했다고 한다.

말이든 글이든 사람을 사로잡는 메시지엔 ‘키스마크’가 있다. 미국 광고업계의 카피라이터들을 위한 ‘KISS’라는 금언 얘기다. “Keep it simple, Stupid(간결하게 하란 말이야, 멍청아)”를 줄인 말인데 이것저것 다 강조하려다가는 아무것도 전할 수 없으니 글을 쓸 때는 되도록 짧게 요점만 짚으라는 충고다. 이젠 카피라이터뿐 아니라 글을 쓰는 모든 현대인에게 해당되는 금언이 됐다.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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