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판매 금지... 박정희가 만든 희한한 세상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이길상 2023. 10. 20.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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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1961년의 색다른 커피 소송

[이길상 기자]

 1960년 4.19 혁명 당시 모습
ⓒ 위키미디어 공용
1960년 12월 31일 <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1960년은 "4월 혁명의 해로서 한국 역사상 길이 남을 만한 해"라고 긍지를 나타내는 동시에, 신년에는 국민 모두가 "주권자로서의 자각과 책임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당부하였다.

이런 긍지와 당부의 말이 넘치는 가운데 1961년을 맞았다. 4월 혁명의 완수를 지향하는 해였다. 민주주의적 질서를 세우고 정신적·물질적 빈곤을 퇴치하는 것이 당시 언론에서 주장하는 혁명의 완수였다. 언론인 류달영은 이 혁명의 완수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혁명에 대한 진정한 이해의 결핍과 혁명 완수에 대한 열렬하고 진지한 성의의 부족"이라고 설파하였다. 이런 주장에 부응하여 다양한 운동이 벌어졌다.

그중 하나가 학생들이 벌인 '커피'와 '양담배' 배격 운동이었다. 이 자발적 운동이 '신생활계몽운동'이었다. 사치한 생활을 하지 말자는 운동의 상징이 커피와 양담배 배척이었다. 당시 자주 언급된 사례가 영국인들의 커피 배격 운동이었다. 전후 영국인들은 실제로 수입품인 커피나 차 마시기를 주저할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여 경제 회생을 이루었다.

학생뿐 아니라 교사들도 신생활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61년 2월 21일 자 <조선일보>를 보면 서울시내 교원들로 조직된 '신생활교원동지회'가 조직되어 5개 항의 실천 목표로 발표하였다. 1. 의복은 해져 못 입을 때까지 기워입는다. 2. 밥은 잡곡을 섞어서 먹는다. 3. 커피는 안 마신다. 4. 옳지 않은 금품을 안 받는다. 5. 부형에 따라 학생을 차별치 않는다. 이렇듯 커피는 반혁명을 상징하는 물품이 되어 배격되었다.

이런 운동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커피 사랑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된 다방의 유행, 전쟁도 막지 못한 커피 붐이었다. 여전한 것은 커피의 불법 유통이었다. 밀수나 미군 부대를 통해 흘러나온 커피가 다방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미군 매점(PX) 물건 운반 트럭을 습격하여 3만 불 어치 커피와 담배를 턴 "7인조 절도단 체포" 소식(1961. 2. 10, <경향신문>)과 비슷한 뉴스는 거의 일상적으로 들어야 했다. 혁명은 혁명이고 커피는 커피였다.

"한국 관광은 다방 구경?"은 <조선일보> 1961년 4월 23일 자 기사 제목이다. 외국 원조로 세워진 상공회의소 건물 다방 옆에 또 하나의 다방이 들어선 것을 풍자하는 기사였다. 한 건물, 같은 층에 다방이 두 개가 생길 정도로 다방과 커피 유행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1961년 3월 21일 판문점에서 열린 유엔 중립국감독위원회와 북한 간의 회의에서 유엔 측이 커피를 마시자 북측은 차를 마시는 풍경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음료에서도 남은 커피, 북은 차로 분단되는 상징적 모습이었다. 정치에 이은 문화의 분단도 다양하게 시작되었음을 말해주는 광경이었다.

당시 커피의 유행을 보여주는 것은 다방 숫자였다. 서울 시내에만 1200여 다방이 성업 중이었다. 누군가 말했듯 "불경기니, 물가앙등이니 해도 커피 맛은 잊을 수 없는 모양"들이었다. 부산 지역에도 서울의 절반 가까운 468개의 다방이 있었고 다방마다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많았다. <조선일보> 표현대로 "전국 방방곡곡 시골 산촌에까지 다방 간판이 나붙고" 있었다.

해방 이후 최초 '다방 수난 시대'
 
 1961년 4월 29일 자 <동아일보> 기사 "특정외래품판금법안상정"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그런데 갑자기 커피 배격을 법으로 강제하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특정외래품판매금지법(안)'이 1961년 4월 29일 자 신문에 발표되었다. 국내 산업 보호와 건전한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할 목적으로 같은 해 5월 10일에 발효된 이 법에 따라 커피세트, 코코아 등의 수입 및 판매가 전면 금지되었다. 금지된 외래품을 팔다가 잡힌 사람이 취득 경로를 자백하면 그 형을 감해주는 희한한 법률이었다.

이 희한한 법이 발효된 지 6일째 되는 날 서울 시내에는 탱크 소리, 군화 소리와 함께 '혁명'을 외치는 군인들이 활보하는 더욱 희한한 세상이 열렸다. 5.16 군사 쿠데타였다. 쿠데타 2주일 후인 5월 29일 아침을 기해 다방에서 커피가 일제히 자취를 감췄다. 말은 자진해서 커피 판매를 중단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쿠데타 세력에 의한 강제 조치였다.

강제 조치는 아니었다는 것을 강변했지만 믿을 사람은 없었다. 치안국장은 "다방업자들을 불러서 막대한 외화를 소비하고 있는 커피를 되도록 팔지 말고 생강차나 기타를 대용해 팔도록 함이 어떻겠는가?라고 권장했다"고 발표하였다.(<조선일보> 1961년 5월 29일 자). 강제로 커피를 팔지 말라는 말은 아니었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외국인이 많이 출입하고 기업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반도호텔 커피숍은 예외였다. 이 호텔에서만 커피 판매가 허용되었다. 덕분에 이 호텔은 이전에 하루 200잔 이하를 팔던 커피가 600잔 이상 팔렸다. "커피 있는 이방지대"였다(<조선일보> 6월 4일 자).

반도호텔 커피숍 외의 모든 다방에서 손님은 1/5로 줄어들었고, 공무원의 다방 출입은 금지되었다. 커피 한 잔 값을 150환에서 100환으로 낮추어도 손님이 없었고, 견디기 어려우면 전업하거나 폐업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해방 이후 최초로 맞는 '다방 수난기'였다. 이 땅에서 다방이란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 아닌가를 염려할 지경이었다. 커피나 양주는 외국인에게도 팔면 안 되는 물품이었다.

1961년 7월 22일 쿠데타 세력은 4월 혁명 세력이 제정한 '특정외래품판매금지법'을 구현하기 위해 특정외래품을 지정하여 고시하였고, 지정된 물품은 9월 1일부터 판매뿐 아니라 영리 목적의 소유 또는 점유 행위도 금지되었다. 커피는 당연히 금지 품목에 포함되었다. 4월 혁명 정신을 이어받은 5.16 쿠데타 세력이었다. 이어 9월 5일부터 커피 판매에 대한 단속이 시작되었다. 신문 여기저기에 "한산해진 다방" 풍경이 소개되었다.

자고 나면 외국산 커피 단속 소식이 전해졌다. 12월 1일까지 3개월간 단속한 결과, 서울 시내에서 적발된 다방이 377개였고, 이 중 62개는 1개월 영업정지, 63개는 과태료 부과 등 행정처분을 받았다. 영업 중이던 다방의 1/3 정도가 적발된 셈이었다. 부산과 대구에서도 비슷한 단속과 적발이 이루어졌다. 적발 결과를 수시로 발표하면서 경찰 당국은 커피 파는 일을 "국가 경제를 좀먹는 행위"로 규정하였다.

쿠데타가 만든 희한한 세상
 
 1961년 12월 28일 자 <경향신문> 기사 "변혁의 1961년 무엇이 어떻게 변했나 (7) 판금된 외래사치품"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그런데 아무리 커피를 단속해도 마실 사람은 마셔야 했고, 아무리 처벌을 해도 커피는 유통되었다. 그해 가을이 되자 다시 입시 시즌이 시작되었다. 학교 다녀온 초등학생 아이에게 엄마가 "오늘 몇 점 받아 왔니?"라고 물으면, 이어서 아버지가 묻고, 가정교사가 묻고, 식모까지 물어보는 세상이었다.

초등학생에게 몇 번씩 세수를 시키고, 커피를 몇 잔씩 마시게 하면서 밤이 이슥하도록 교과서를 외우게 해야 일류 중학교에 들어가는 시절이었다. 이런 가정에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커피가 전해졌다. 이래서일까 1961년 11월 들어 커피 판매가 다시 증가하였고, 커피 단속이 재개되었다.

이때 색다른 커피소송이 벌어져 신문 지상에 자주 등장하였다. 11월 30일 명동 소재 명지다방의 주인 한모씨가 "색다른 커피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자신의 다방에 대해 10일 영업정지 처분이 내려지자 '행정처분효력정지가처분신청'을 서울지법에 제출하였다. 자신은 외래 커피를 판매한 적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한 신문은 "다방의 이름을 알리기 알맞겠다고 생각하여" 시장을 상대로 영업정지 취소 소송을 한 것이라고 비꼬았다. 노이즈마케팅이 아니냐는 의심이었다(<경향신문> 1961년 12월 1일 자). 이 소송은 12월 7일 서울시 측이 승소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커피 판매가 금지되자 커피를 함유한 커피캬라멜이라는 신제품이 인기를 끌었다. 신문마다 한 기업이 낸 '포켓트커피' '포켓트 속에 전용다방' '언제나 커피의 미각을 즐길 수 있는 커피캬라멜'를 주장하는 광고가 넘쳐났다.

1년 전 4월 혁명을 칭송하던 신문은 "다방에서 커피가 자취를 감추고 난 이 강산에는 새로운 기풍이 진작되기 시작하였다"고 쿠데타가 만든 희한한 세상을 찬양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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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커피세계다 + 한국가배사>(2021, 푸른역사) <동아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1961년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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