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 사건 두 달, '김행랑' 청문회를 보며 느낀 것

송혜림 2023. 10. 20.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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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함만 남았다... '여성 안전'을 고민하는 장관 후보자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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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림 기자]

나는 생각이 많아질 땐 혼자서 사찰 주변을 산책한다. 지방에 살다가 2년 전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부터 들였던 습관이었다. 특히 저녁은 고요해 사색을 즐기기 좋은 시간이 된다. 며칠 전에도 조계사 둘레길에 올랐다. 밝은 초저녁이었고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평소처럼 차분히 옮기던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작은 바람소리에도 깜짝 놀라 고개를 둘러봤다. 사찰 주변이라 안전하다고 생각하려 해도, 어딘지 불쾌한 긴장감이 올라와 온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결국 길가 벤치에 앉아 있던 한 남성을 마주치곤 대뜸 혼자 놀라 둘레길을 허둥지둥 빠져 나왔다. 문득 이제 나는 혼자서는 숲길 산책을 하기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서울 신림동 공원 강간 살해 사건이 발생한 지 약 두 달이 흘렀다. 국민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줬던 그 사건은 우리의 일상을 조금씩 바꿔놓았다. 최근 내가 사는 주택가 인도에 큼지막하게 새로 생겨난 '여성 안심 안전길' 형광 표식도 그랬다. 밤길을 희마하게 밝히는 그 표식이 범죄 예방에 얼마나 도움이 될 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저 멀리 국회 사람들이 나의 안전을 외면하고 있진 않다는 거니까.

'출퇴근길 조심해' 지인들과 나누는 인사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단체와 시민들이 지난 8월 24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야산 등산로 성폭행 살인 사건 현장에 모여 피해자를 추모하며 묵념하고 있다.
ⓒ 유성호
"요즘 흉흉하잖아. 출퇴근길 조심하고."

여전히 친구들과 나누는 인사 속엔 '흉흉하다'란 말과 '조심하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난 요즘도 지인들에게 출근길 호신용품은 챙겼느냐고 물어본다. 사건이 발생 한 지 벌써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이젠 괜찮지 않냐는 말을 듣는 날에는, 방향 모를 괜한 원망이 가슴을 누른다. 그 어떤 것도 괜찮아지지 않았다. 안전이 사라진 곳은 숲길뿐이 아니다. 강의실에서, 군대에서, 회사에서, 지하철에서, 자취방에서. 오늘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죽임을 당하고 있다. 여성들은 여전히, 안전하지 않다.

오랜 기간 반복되어 온 남성에 의한 폭력을 허물려면 험난한 노력이 필요하다. 뿌리깊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개인과 단체의 노력만으론 변화를 이끌기 어려워 우린 일찍이 국가 기관을 세우고 정책을 제정할 권력을 부여했다. 지금은 때 아닌 존폐론에 휩싸여 뜨거운 감자가 돼 버린 '여성가족부'다.

여성 이슈를 첨예하게 다루는 만큼 비판도 많이 받는 여성가족부지만, 최근 발생한 여러 사건들로 다시금 존재 가치를 상기시켰다. 여성 안전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사회 곳곳의 피해들이 재발하지 않도록 감시해나갈 국가 기관이 여전히 우리에겐 절실하단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가장 중요한 때에 맞춰 여성가족부의 수장을 뽑는 자리가 열렸다. 후보자 자리에는 위키트리 공동창업자로 알려진 '김행'이 올랐다. 후보자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논란이 끊이질 않았지만, 그래도 난 일말의 기대를 했다.

사회 이면을 들여다보는 언론인이었으니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도 남들과는 다를 거라고 여겼다. 적어도 김 전 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열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여성 안전 뒷전인 사람이 여가부 장관 후보자라니
 
 지난 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질의하며 띄운 화면. 용 의원은 김 후보자가 공동 창업한 위키트리 기사 중 2차 가해와 성희롱성 발언 기사들을 소개하며 이를 비판했다. (노컷브이 유튜브 화면갈무리)
ⓒ 노컷브이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이 인사청문회에서 신랄하게 지적했던 것처럼, 화려한(?) 김 전 후보자의 전력을 들으며 절로 실소가 나왔다. 요약하면 그는 여성의 안전을 강화시키기보다는 되려 퇴보시킨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김 전 후보자가 공동창업한 위키트리에서 쏟아져 나온 기사들은, 내가 학창시절 때 배웠던 '황색 저널리즘'의 전형이었다. 기사만 봐도 '신성한 지하철 안에서...', '역대급 노출', '누드톤 원피스' 같은 자극적 제목이 대다수였다. 이런 여성 혐오성 황색 보도가 문제인 이유는 읽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성적 관념을 심어 준다는 데 있다. 온라인에서 갖게 된 왜곡된 생각은 고스란히 오프라인에서 잘못된 행동으로 이어지기 쉽다.

위키트리의 기사들은 타인의 피해를 마치 가벼운 가십인 것처럼 다뤘다. 특히 여성 피해자를 다룬 기사의 경우 훨씬 더 노골적으로 2차 가해를 저질렀다. 용혜인 의원이 지적한 것처럼 선정적이고, 불필요한 성적 상상을 일으켰으며, 가해행위의 심각성을 희석했다. 

김 전 후보자는 아마도 펜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제도도 다르지 않다. 기사도, 제도도 사회의 어둔 단면을 바꾸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쓰이고 제정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어떠한 가치도 갖지 못한다.
    
적어도 고통에 공감은 하는 사람이었으면 

아마 그 누구도 여성가족부 장관 자리에 '완벽한 사람'이 오기를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아침 출근길에 성폭행을 당하고, 건강을 해칠 것을 감수하고 낙태약을 삼키며, 한때 사랑했던 애인에게 맞을 게 두려워 '안전 이별'을 검색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들을 한번이라도 기억하는 사람을 원했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늘 역사를 바꿔왔으며, 여성들에게는 지금 그런 수장이 필요하니까. 

그러나 김 전 후보자는 결국 인사청문회장에서 퇴장하며 '줄행랑'을 쳤고, 자진 사퇴로 물러났다. 온라인에서 '김행랑(김행+줄행랑)'이라 회자되는 그 장면은 몇 번이고 돌려봐도 웃기고 슬프면서 한편으론 씁쓸하다. 나는 김 전 후보자가 당시 어떤 마음이었는지 사실 좀 궁금하기도 하다. 당당함이었을까, 아니면 부끄러움이었을까.(관련 기사: '김행랑' 된 후보... "짐 쌌으면 그만 둬야" https://omn.kr/25wgp ).

나도 물론 예전엔 회사 면접장에서 뛰쳐나가고 싶을 때가 있었다. 나라는 사람의 자질을 질문 몇 번으로 가차 없이 평가당하니 말이다. 그래도 버텼다. 정말 그 회사에 입사하고 싶었으니 말이다. 나 같은 일개 시민도 버티는데 장관 후보자란 사람이 도망을 친다니. 사실 김 전 후보자는 그리 절실하게 여성가족부 장관이 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치기 어린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김현숙 장관의 사표 처리는 아직이라지만, 어찌 됐든 여성가족부 장관 자리는 다시 빈 자리가 됐다. 더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다음 후보자가 누가 나올지 꼼꼼히 살피고 국민의 입장에서 면밀히 검증해야 한다. 과거 여성가족부를 설립하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했던 여성들과 운동가들을 노력을 폄훼하지 않는, 적어도 여성 안전을 퇴보시키지는 않은 리더가 자리하기까지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 
 
 '역무원 스토킹 피살 사건'이 발생한 지난해 9월 16일, 사람들이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화장실 입구에 마련된 추모공간을 찾아 추모하는 모습. 그럼에도 '여성이 행복한 서울'이라고 적힌 간판이 눈에 띈다.
ⓒ 공동취재사진
오늘도 수많은 여성들이 등굣길과 출퇴근길을 오고 간다. 누군가는 아이의 손을 잡고 어린이집에 가고, 또 누군가는 지팡이를 짚고 의자에 앉아 떨어지는 낙엽을 구경할 테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일상이 주춤거리는 내가 다음 후보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중요한 건 그저 국민들의 평범하고 소중한 일상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 하루하루 일상의 불안함을 없애고, 무너지는 듯한 안전을 쌓아 올려야 한다는 것.

그런 일들을 맡는 데 적격인 이가 장관으로 와서 국민들과 함께 이런 작은 소망들을 천천히, 하나씩 이뤄 나갔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다. 그 무거운 책임을 망설임 없이, 혹은 망설이면서도 기꺼이 어깨에 짊어지겠다는 이가 모두가 원하는 장관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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