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회의에서 나온 질문 "왜 썸을 안 타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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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숙 기자]
서른 후반의 남여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 수정본이 내 손에 들어왔다. 벌써 2차 수정본이다. 도시 생활에 너무 지친 나머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서울에서 각자 회사를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향하는 남여 주인공이 기차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여자의 고향은 삼랑진, 남자의 고향은 부산. 여자 덕분에 삼랑진을 처음 알게 된 남자는 고향에 내려온 후 삼랑진을 방문했다가 무엇에라도 홀린 듯 퇴직금을 털어 폐허가 된 건물 하나를 사서 카페를 열고 행복해진다는 이야기.
▲ 나는 심심할 때 '연애'를 했는데 그들은 심심할 때 연애보다 훨씬 재밌는 일이 많아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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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남여 주인공을 서로 호감을 느끼게, 가치관도 비슷하게, 말도 통하게 만들어 놓고는 정작 1미터30센티미터 정도의 거리를 절대 유지시키는 거다. 유부녀 편집자가 보기엔 저 정도면 썸을 넘어 연애를 하고도 남을 에피소드에서도 절대 거리 유지. 이정도면 '개연성' 부족 아닌가 싶은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작가에게 수정을 제안하기 전에 출판사 내 20, 30대 남여를 붙잡고 회의를 시작했다. 도대체 이 둘, 왜 썸을 안 타는 거냐고. 나로선 '헉' 할 만한 정말 흥미로운 대답들이 쏟아져 나왔다.
첫째 '귀찮다'. 둘째 '핸드폰으로 보고 즐길 게 너무 많다'. 셋째 '연애는 나만 손해보는 관계 같아서 싫다'. 넷째 '여자가 예쁘냐?'. 다섯째 '이미 청명과 연애 중이다'. 여기서 '청명'은 유명한 웹소설 <화산귀환>의 남주 이름이다.
'청명' 생일이 10월달이었는데 BTS 생일잔치 저리가라 싶게 홍대 카페에서 '생파'도 열렸단다. 울 여직원은 선착순에 밀려 못 가봤단다. 그걸 울상을 하고 말하는데, 회의를 여기서 끝내야 하나 살짝 고민이 됐다.
그나저나 처음엔 농담처럼 들렸던 그들의 진심을 한 시간째 듣고 있자니 소설 속 주인공이든 현실 속 우리 직원들이든 그들이 썸을 안 타는 이유가 점차 납득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심심할 때 '연애'를 했는데 그들은 심심할 때 연애보다 훨씬 재밌는 일이 많아 보였다.
나는 사랑을 느끼고 싶어 사람과 연애를 했는데 그들은 웹소설 주인공을 덕질하는 일이 사랑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랑하는 관계라면 희생과 행복이, 또는 갈등과 화해가 50:50으로 동일하게 일어나는 게 정상이라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희생도 갈등도 겪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건 다 스트레스라고 느끼는 것 같았고, 희생은 불행을 불러오고 갈등은 싸움을 일으킨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험치는 일천하고 거의 다 SNS와 미디어에서 들은 얘기였다.
갈등 없는 화해는 팥 없는 단팥빵처럼 밋밋한 맛이라고, 희생 없이 받기만 하는 사랑은 쫄쫄 굶어서 살을 뺀 다이어트처럼 잠깐은 좋겠지만 금세 요요가 찾아올 거라고, 아니 그보다 더 찰진 비유를 들어 찰떡같이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서만이라도 핸드폰을 잠시 거두고 싶었다. 삼랑진을 와이파이가 안 터지는 마법의 공간으로 설정하고 싶었다. 썸이든 연애든 결혼이든, 직접 해보고 아파보고 다시 일어서서 찐사랑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남의 연애사를 들을 수 없는 법이라도 만들고 싶었다.
소설에서 개연성을 어떻게 보충해야 하는지 답은 나온 것 같았다. 관계에 지쳐 삼랑진에 내려온 이 순간만큼은 그들에게 연애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스트레스 없이 행복한 일, 즉 소설 쓰기나 마을 돌보기 같은 일에 몰입 중인 자신에게 만족하는 설정을 입혀주면 나 같은 결혼한 독자들에게도 이해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의를 끝내기 전에 아쉬움에 한 마디 남겼다.
"연애하는 사람들은 자기들 좋은 이야기는 남한테 안 해요. 싸우고 헤어진 이야기만 하지. 여러분은 반쪽짜리 연애사만 듣고 지금 연애가 피곤하다고 안 하고 있는 거야. 진짜 억울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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