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가 애정을 가지고 지냈던 유일한 도시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기자]
제네바에서 리옹에 도착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중간중간 여러 역에 서는 완행 열차를 탔는데도 두 시간이면 리옹에 도착할 수 있더군요.
그렇게 리옹과 마르세유를 여행했습니다. 프랑스 남부의 대표적인 도시들이죠. 두 도시는 프랑스 제2의 도시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대륙을 돌아 프랑스로 돌아온 셈이었습니다. 그간 북유럽과 중부 유럽, 발칸 반도와 이탈리아까지 여러 나라를 돌았습니다. 프랑스의 국기를 오랜만에 다시 보았습니다.
▲ 리옹 시청 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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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만난 프랑스는, 어쩐지 지난번과 비슷하지만 또 다른 풍경이었습니다. 파리와 비슷한 부분도 있었지만, 남부 프랑스에서만 볼 수 있는 정취도 있더군요.
특히 큰 도시들보다 오히려 아를에 방문했을 때, 남부 프랑스의 모습이란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리옹의 카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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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아를을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 시절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지요.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도 아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를 지역에는 중세 '아를 왕국'이라는 국가가 들어서기도 합니다. 하지만 남프랑스의 중심지는 점차 마르세유로 옮겨 갔죠. 근대에 접어들며 아를은 점차 근교의 소도시로 축소됩니다.
▲ 아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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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유명한 반 고흐의 작품들은 대부분 아를에서 그려진 것입니다. <밤의 카페테라스>나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 <아를의 침실> 같은 작품들이 이 곳에서 완성되었죠. <해바라기> 연작 중에서도 아를에서 그려진 것이 많습니다.
아를에 거주하던 시기 반 고흐의 작품은 특유의 노란 색감과 뛰어난 빛의 표현을 완성해 나갑니다. 현재까지도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죠. 당시에도 일부 작품들이 파리 독립예술가협회 전시에 초청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반 고흐의 아를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반 고흐가 고갱과 함께 살며 작품활동을 한 곳이 바로 아를이었죠. 반 고흐는 여러 작가들이 함께 살고 교류하면서 꾸리는 스튜디오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고갱은 그 제안에 응한 사실상 유일한 사람이었죠.
▲ 아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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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반 고흐는 퇴원해 병원과 집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반 고흐의 불안정한 상태를 우려한 아를의 시민들은 반 고흐를 병원에 감금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반 고흐는 이듬해인 1889년 3월부터 다시 병원에 입원해 지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뒤인 5월, 아를을 떠나 생레미의 요양원으로 떠났습니다. 다시 생레미에서 두 달을 지낸 반 고흐는 파리 근교의 오브르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권총 자살로 사망했습니다.
▲ <밤의 카페테라스>를 테마로 한 카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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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에는 고대 로마의 공동묘지인 '알리스캉(Alyscamps)'이라는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반 고흐도, 고갱도 이 유적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죠. 반 고흐가 그린 <가을 낙엽>과 눈 앞의 풍경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는 듯한 조용한 풍경입니다.
▲ 알리스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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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한켠에는 지역 도서관이 만들어졌습니다. 외관과 달리 현대적인 시설의 도서관에서 사람들은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건물 2층에는 엑스-마르세유 대학의 강의실이 위치해 있습니다. 쉬는 시간인지 복도에 나와 떠들고 있는 대학생들의 활기찬 모습이 보입니다.
▲ 아를의 병원이 있던 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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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의 모습은 평화롭습니다. 반 고흐가 살았던 때에도 아를의 모습은 이랬을까요? 달라진 것들과, 달라지지 않은 것들을 천천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프랑스의 정취를 느껴 봅니다. 파리에서 느꼈던 것과는 많은 것이 다르고, 또 많은 것이 비슷했습니다.
파리를 여행할 때 느꼈던 들뜸과 설렘은 없지만, 이 도시에는 편안한 풍경이 있었습니다. 골목을 돌 때마다 보이는 아름다움은 그대로였습니다. 대륙을 돌아 다시 돌아온 프랑스에서, 다시 반 고흐의 흔적을 만났습니다. 파리의 미술관에서 본 반 고흐의 흔적과, 아를에서 만난 고흐의 흔적을 비교해 봅니다. 파리와 아를은 그만큼이나 달랐고, 또 그만큼이나 닮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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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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