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이혼을 막은 '속사정'
[김종성 기자]
▲ MBC <연인> 한 장면. |
ⓒ MBC |
사대부 가문의 부인으로 평온하게 살았던 주인공 길채(안은진 분)도 예외가 아니었다. 병자호란 뒤에 집 밖을 나섰다가 갑작스레 납치된 그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청나라로 끌려가는 몸이 됐다. 청나라로 보내졌다가 도망친 뒤 청나라로 다시 송환되는 사람들의 대열에 그도 합류하게 됐다.
자신은 양반가 여성이며, 끌려갔다가 도주한 적이 없다고 길채는 통사정을 해보았다. 하지만 호소는 먹혀들지 않았다. 청나라 측도 그처럼 애매한 피해자가 많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낯선 이국 땅에 끌려간 길채는 청 황족의 잠자리 시중을 들어야 할 상황으로까지 내몰리게 됐다.
남편이자 무관인 구원무(지승현)는 처음에는 길채가 옛 연인인 이장현(남궁민 분)을 찾아 일부러 집을 나간 것으로 오해했다. 그랬다가 실상을 알게 된 뒤 부인을 찾아 나설 준비를 서두르게 됐다.
드라마 속의 구원무처럼 의리 있는 남편들은 실제로는 거의 없었다. 특히 사대부 남성들은 그랬다. 조선의 사회체제는 양반가 남성들이 그런 상황에서 적극성을 발휘하는 데에 제약이 됐다.
음력으로 효종 즉위년 11월 21일자(양력 1649년 12월 24일자) <효종실록>에는 검찰청에 해당하는 사헌부가 효종 임금 앞에서 송나라 유학자인 정명도·정이천 형제을 거론하는 대목이 나온다. 사헌부는 이 형제를 지칭하는 정자(程子)를 언급하면서 "절개를 잃은 이를 아내로 맞아 배필로 삼는 것은 절개를 잃는 것이다"라는 것이 정자의 가르침이라고 역설했다.
이 장면에서 나타나듯이 유교 사대부들은 절개를 잃은 여성과 함께 사는 남성도 절개를 잃은 사람으로 간주하려 했다. 그랬기 때문에 <연인>의 구원무처럼 청나라에 끌려간 부인을 구출하려고 행동에 나서는 사대부 남성은 드물었다.
그 같은 사회 분위기는 전쟁 상황에 처한 사대부 여성들에게 이중의 고통을 안겨줬다. 전쟁의 참화로부터 자신과 가족의 신변을 지키는 것 못지않게, 유학자들이 정절이라고 말하는 것을 지키는 데도 동시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광해군 때인 1617년에 <삼강행실도> 및 <속삼강행실도>의 속편으로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그 같은 이중고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에서는 임진왜란(1592~1598) 때 민간인 신분으로 충신·효자·열녀로 공식 지정돼 집 앞에 정문(旌門)이 세워진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숫자를 통계로 정리한 이숭녕 서울대 교수의 논문 <임진왜란과 민간인 피해에 대하여 - <동국신속삼강행실>의 피해 보고서적(報告書的) 자료를 중심으로 하여>는 충신·효자를 위해 세운 정문보다 열녀를 위해 세운 열녀문이 훨씬 많았음을 알려준다.
1962년 6월 <역사학보>에 실린 이 논문에 따르면, 순수 민간인 신분으로 정문이 세워진 434명 중에서 효자와 충신은 각각 67명과 11명이다. 나머지 356명은 열녀들이었다. 민간인 신분으로 사후에 표창된 사람의 대부분은 일본군의 전시 폭력 앞에서 죽음을 불사한 여성들이었던 것이다.
통계가 상황을 다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시대 여성들이 정절에 관한 사회적 요구에 대해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며 살았는지를 이 통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군 병사들의 전쟁범죄 앞에서 죽음을 불사하게 만드는 혹독한 사회 분위기도 느낄 수 있다. 살아서 돌아가 수모를 겪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낫다는 심리가 그런 선택을 강요하는 기제가 됐으리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 MBC <연인> 한 장면. |
ⓒ MBC |
▲ MBC <연인>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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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살아서 돌아가 수모를 겪더라도 일단은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여성들도 당연히 적지 않았다. 정묘호란·병자호란뿐 아니라 임진왜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여성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왕조는 현실적 대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여성들을 정절을 상실한 실절(失節) 여성으로 간주해 가정과 사회에서 매장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 숫자가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조는 피해를 입고 귀환한 여성들을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하는 정책을 선택했다.
선조는 일본군에 의한 피해 사실을 근거로 남편들이 이혼을 요구하지 못하게 했다. 선조가 이런 선례를 만들었다는 점은 인조 16년 3월 11일자(1638년 4월 24일자) <인조실록>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선조는 피해 여성과 이혼하려 하는 왕족의 청구를 기각했다. 군주가 대법원장 역할도 겸했기 때문에 군주의 뜻에 반하는 이혼이 불가능했던 왕정체제를 반영하는 장면이다.
선조는 일본군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뒤 집으로 귀환한 여성도 보호했다. 이 여성이 귀환했을 당시, 그의 집에는 새로운 여성이 있었다. 그 사이에 남편이 새 출발을 했던 것이다. 이때 선조는 피해 여성을 정실 부인으로 인정하고 재혼한 부인을 첩으로 인정하는 왕명을 내렸다. 그의 남편은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 다시 '새 출발'을 해야 했다.
선조가 그렇게 한 이유와 관련하여 1999년에 <민속학 연구> 제6호에 실린 장병인 충남대 교수의 논문 '조선시대 이혼에 대한 규제와 그 실상'은 "많은 사족녀들이 연루되었고 국난이라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빚어진 변고였기 때문에, 국가에서 이들 피해 여성들에 대한 이혼을 공식적으로 허락하기란 곤란한 일이었다"라고 설명한다. 양반집 여성들도 피해를 많이 입은 데다가 국가의 무능으로 인해 발생한 현상이었기 때문에, 국가가 일방적으로 남성 편만 들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선조의 이혼 불허 정책은 정확히 표현하면 피해 여성과의 이혼을 국가가 승인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사실상의 이혼까지 막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선조의 정책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인조시대에도 계속 유지됐다.
그러나 인조가 죽고 효종 정권이 출범하면서 상황이 바뀌고 말았다. 위의 <효종실록>에 따르면 새로 즉위한 효종은 기존 정책을 뒤엎고 피해 여성들에 대한 이혼을 허용했다. 효종 즉위 6개월 뒤의 일이다.
임진왜란 이후의 사회 현상 중 하나는 이른바 노사분규의 급증이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사회질서가 동요하고 기존의 상하관계가 힘을 잃으면서, 소작농인 노비들이 지주에게 대항하거나 토지를 이탈해 도시로 숨어드는 등등의 일이 많았다. 양반 지주계급의 사회지배를 곤란케 하는 현상들이 증대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대중의 권익이 증대되고 특권층이 위축되는 진보적 현상에 대한 반발이 본격화된 것이 효종 즉위 이후였다. 효종의 스승이자 보수세력 지도자인 송시열을 비롯한 유교 원리주의자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커지면서 이른바 우경화 현상이 심해진 것이다.
보수파가 이전보다 훨씬 더 득세하는 분위기 속에서 피해 여성 보호 정책은 뒤집혔다. 일반 평민의 권익을 저해하는 우경화 현상의 확산이 피해여성 보호 정책에도 악영향을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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