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물 클리셰 깨려다... 스토리 잃어버린 '발레리나'
[원종빈 기자]
▲ 넷플릭스 오리지널 <발레리나> 스틸컷 |
ⓒ 넷플릭스 |
*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공허한 시간을 보내던 전직 경호원 '옥주'(전종서). 어느 날, 그녀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온다. 유일한 친구이자 유학 중인 줄 알았던 발레리나 '민희'(박유림)가 자기 집에서 맥주 한 잔 하자고 부탁한 것. 하지만 민희 집에 도착한 옥주는 이상한 느낌을 받고, 이내 자살한 민희와 복수를 부탁한다는 편지를 발견한다.
친구의 편지를 단서 삼아 민희의 마지막 소원을 이뤄주기로 결심한 옥주. 그녀는 민희가 남긴 ID를 추적해 여성과의 성관계를 영상으로 남기고 팔아먹는 성범죄자 '최프로'(김지훈)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에 옥주는 가장 확실하고 잔인하게 최프로와 그의 공범을 징벌할 계획을 짜고,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다.
<발레리나>와 '여백의 미'
'여백의 미'는 흔히 동양화만의 미학으로 여겨진다. 화폭을 가득 채워서 그림을 그리는 서양화와 달리 동양화에서는 일부러 남긴 여백을 흔히 찾아볼 수 있기에 통용되는 말이다. 이는 그리려는 대상의 외적인 면모보다 본질을 강조하는 방법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간결하고 압축적인 그림을 통해 숨어 있던 대상의 본질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유도하는 미학적 접근인 셈이다.
물론 일장일단이 있다. 수용자 입장에서는 창작자의 의도나 목적이 와닿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이라면 더욱 그렇다. 많은 대중이 인지하는 최소한의 구성 요건을 갖출 때 창작자의 감성도 두드러질 수 있으니까. 지나치게 많이 생략해 버리면 해당 작품에서 감동을 받기는 어렵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발레리나>는 바로 이 대목을 간과했다. <테이큰> 시리즈부터 <존 윅> 시리즈까지 액션 복수극은 근 몇 년간 쏟아져 나왔다. 이에 <발레리나>는 복수 액션물의 클리셰를 깨기 위해 과감히 빼기의 미학에 도전한 듯하다. 분위기와 액션만으로 시청자를 설득하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그저 가장 중요한 요소를 빼먹었을 뿐이다. 영화는 시각 예술일 뿐만 아니라 극예술이라는 사실을.
▲ 넷플릭스 오리지널 <발레리나> 스틸컷 |
ⓒ 넷플릭스 |
<발레리나>는 마치 한 편의 발레를 보여주는 듯하다. 여러 스토리를 자세히 들려주려 하지 않는다. 대신 인상적인 배경 안에서 화려한 액션에 집중한다. 옥주가 아무런 설명 없이 슈퍼마켓에서 강도를 때려잡는 첫 장면만 봐도 목적을 알 수 있다. <발레리나>라는 제목은 옥주의 복수극 그 자체를 의미하는 셈이다.
실제로 <발레리나>는 눈이 즐겁다. 발레의 구성 요소에 대응되는 영화적 장치를 영리하게 활용한 덕분이다. 무대 장치 및 조명과 음악으로써 무용수의 몸짓을 강조하듯이, 액션을 돋보이게 한다.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마약 생산 공장이 대표적이다. 공장은 마치 극장 같다. 옥주는 관객석에서 무대로 나아가듯이 계단을 내려간다. 흰색 천이 처진 공연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일련의 액션은 한 편의 발레 공연이나 다름없다.
배경은 스토리 전달의 주된 수단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이해시키는 대신 직관적으로 전하기 때문. 노란 조명에 살림살이가 적은 방은 옥주의 헛헛함을 보여준다. 민희의 집은 화려한 조명과 유리 소품을 조합했다. 밝고 사교적이지만 누구보다 약한 민희의 이야기를 짐작케 한다. 앤틱한 소품이 많은 저택은 쾌락을 추구하고 허영심에 찌든 최프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마구간을 배경으로 악역 간의 갈등을 고조하기도 한다.
힙합 아티스트 그레이가 만든 음악도 옥주의 액션에 힘을 불어넣는다. 특히 긴 액션이 이어지는 시퀀스에서는 지루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3개에서 4개의 곡을 활용해 변주를 주고, 모든 곡이 이어지도록 설계한 점도 인상적이다. 이에 더해 힙합 음악 속에 클래식이 섞인 듯한 사운드는 '다르다'는 인상을 주기에는 충분하다.
발레리나의 '이야기'가 없다
하지만 공간, 조명, 음악의 조합은 실효가 없다. 시나리오가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를 한 편의 '발레극'으로 설계했지만, 정작 '극'적인 요소가 없다. 자연히 눈과 귀가 즐거운 화려함도 점차 평범한 자극이 되어 버린다. 물론 새로운 서사를 전개하기 어려운 장르다 보니 자기만의 스타일, 퍼포먼스에 집중한 의도는 이해가능하다. 그럼에도 영화의 두 기둥 중 하나가 스토리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는 어렵다.
특히 제목인 '발레리나'를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실패했다. 발레리나 친구를 잃은 주인공은 복수를 향해 질주한다. 당연히 발레리나와 주인공의 관계가 명확히 제시돼야 했다. 옥주에게 민희가 소중해진 계기와 지키지 못한 이유를 설득력 있게 보여줘야 했다. <발레리나>는 그러지 못했다. 시청자가 채워 넣어야 하는 여백의 미가 과하다. 뻔한 전개를 피하려다 제목이 '발레리나'여야 하는 이유조차 못 보여줬다.
이는 <존 윅> 시리즈와의 결정적인 차이다. 사실 <존 윅>도 개 한 마리 때문에 그 사달이 나는 게 말이 되냐는 비판과 우스갯소리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존 윅>은 1편부터 최소한 주인공에게 개가 어떤 의미이고, 그에게 아내와 함께 하는 삶이 얼마나 귀중한 시간이었는지를 명확히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 복수의 허망함과 굴레를 성찰하는 깊이감도 있었다.
이처럼 중심 플롯의 설득력이 없으니, 세부 플롯도 중구난방이다. 발단과 결과 외에 과정이 부족하다. '조사장'(김무열)과 최프로의 갈등만 봐도 그렇다. 두 남자의 관계는 묘하다. 친구인 듯 보이며서도 아래위가 확실하다. 영화는 이 긴장감을 활용하지 못한다. 최프로의 일방적인 불만만 강조되고, 둘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전에 조사장이 갑자기 퇴장한다. 절정 없이 허망한 결과만 남는 이야기인 셈이다.
▲ 넷플릭스 오리지널 <발레리나> 스틸컷 |
ⓒ 넷플릭스 |
이러한 스토리텔링 때문에 <발레리나>는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서 부유한다. 감독과 주연 인터뷰를 보면 <발레리나>는 철저히 환상 속에 지어진 성과 같은 영화여야 한다. 이충현 감독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어도 영화적인 판타지로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라고 말했고, 전종서 역시 "현실적으로 처벌이 될 수 없는 것을 영화상에서 통쾌하게 영화적으로 풀어내고 싶다는 것에 대한 것"이라고 밝혔으니.
실제로 영화는 N번방 사건이나 버닝썬 게이트가 연상되는 소재를 철저히 허구의 공간에서 풀어내려 한다. 특히 미국 B급 장르 영화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길가에 휴게소처럼 놓여 있는 식당이 대표적이다. 오프닝에 나오는 슈퍼 마켓도 비치된 제품이나 가게 인테리어, 분위기를 보면 외국 한인 마켓에 가까워 보인다. 옥주가 황무지에서 접선해 총을 구하는 장면도 서부 영화 속 한 장면을 닮았다.
그런데 설명되지 않는 지점이 많다 보니 세계관 구축도 난항이다. 최프로 집 인근에 위치한 오래된 슈퍼처럼 한국적인 요소가 튀어나오는 미세한 지점마다 <발레리나> 만의 세계는 무너지고 만다. 대신 철저히 한국적인 대사와 유머, 레퍼런스가 오히려 부각된다. 철저히 짜인 무대 위에서만 이야기가 전개되어야 하는데, 무대 자체의 결함이 관객에게 노출되는 셈이다.
정작 액션도 아쉽다
그 결과 메인 디쉬라 할 수 있는 액션에서도 단점이 불쑥 튀어나온다. <발레리나>의 액션은 '비틀기'가 핵심이다. 뻔할 수 있는 복수극을 다른 스타일로 풀어내려는 시도다. 우연을 통해 클리셰를 비껴가기도 하고, 예상되는 전개를 생략하거나 우회한다. 슈퍼 마켓 신처럼 템포가 빠르고 속도감이 있는 대목도 눈에 띈다. 그럼에도 2% 부족하다는 인상을 떨치지 못한다. 관습적으로 기대하는 효과까지 과하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일단 눈은 즐거울지언정 액션에서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스토리를 가능한 많이 생략하고 압축했기 때문에, 악을 처단하는 복수자의 처절함이나 아픔이 옥주의 몸짓에 깃들기는 어렵다. 혹자는 사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최프로를 단죄하는 결말에서 카타르시스 보다 화염방사기와 주현, 김영옥의 존재가 먼저 생각나는 이상 끝맺음이 확실한 사이다는 아닌 듯하다.
이에 더해 액션 시퀀스가 전반적으로 짧다는 인상이 짙다. 시청자가 통상적으로 익숙한 수준까지 쾌감이 도달하지 않은 채로 액션이 끝난다. 호텔방에서의 육탄전, 마약 제조 공장에서의 총격전이 대표적이다. 목적을 너무 빨리 이루고, 난관도 너무 쉽게 해결하니 영화도 싱겁다. 러닝타임이 괜히 짧은 게 아니구나 싶을 정도다. 이처럼 이충현과 전종서의 조합도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저주를 끝내 피하지는 못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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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potter1113)와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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