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버' 극장에서 '존버'들이 공연한 까닭은…'버텨내고 존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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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녹슬면 끝이라 했지만 천 번을 두드리는 삶도 세상엔 있는 거였다”(정우 ‘철의 삶’)
마스크 쓴 사람들이 종종걸음치며 지나가는 코로나 시대의 거리에도 오래된 극장엔 햇살이 쏟아졌다. 88년 내내 그랬을 거다. 1935년 광주광역시 충장로에 개관한 광주극장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최선진이 설립했다. 상영관 한 개 뿐인 이곳은 1990년대 멀티플렉스의 시대 들어 쇠락을 피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건재하다.
옛날 영화 포스터들이 붙어 있는 고색창연한 복도에 서서 가수 김일두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세상 이치로 지칠 때"(‘뜨거운 불’)를 노래했다. 일제강점기엔 창극단과 판소리 공연을 보러, 또 해방 후엔 백범 김구 선생의 강연회를 보러 호남 사람들이 드나들었을 출입문 옆에선 정우가 ‘철의 삶’을 읊조렸다. 근처 송도극장ㆍ아세아극장ㆍ한성극장 등은 이제 없어졌다. 그나마 창업주 일가와 후원회원들의 애정으로 버티고 있는 광주극장의 사무실에선 아마도이자람밴드가 “산다, 모두들 살아간다”(‘산다’)라고 노래했다. 856석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좌석을 갖춘 이 영화관 객석에서는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이 “나는 악어떼가 너무 두려워 알아서 길 수밖에는 없었네”(‘악어떼’)를 불렀다. 트라이앵글ㆍ멜로디언 반주가 더해진 어른을 위한 잔혹동요다. 여전히 달마다 아날로그 영사기를 사용해 필름 영화도 상영하는 영사실에서 ‘마지막 만담’을 연주한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는 “관객을 웃기지 못한 만담가, 그게 나 같다”고 말했다.
오래된 극장에 “잘 버텨내 줘서 고맙다”고 하는 노래 인사는 이른바 ‘돈 안 되는 음악’하는 자신들, 또 획일성을 강요하는 시대에 자기만의 길을 찾는 이들에게 건네는 말 같다.
"돈 안 되는 음악? 계속해도 된다"
싱어송라이터 최고은은 2019년부터 고향 광주로 주변 예술인들을 불러 공연과 북 콘서트 등을 열어왔다. 코로나 19로 공연이 멈춘 2021년에는 광주극장에서 음악인들의 온라인 라이브 공연을 열고 이를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최고은은 “거짓말처럼 많은 것들이 멈춰 버린 시기에 음악인으로서 생존 신고할 방법을 찾았다. ‘돈 안 되는 음악 계속해도 되나’ 질문도 많던 시기, 동료들을 보며 ‘해도 된다’는 힘을 얻었다”고 돌아봤다. 이렇게 나온 다큐멘터리 영화 ‘버텨내고 존재하기’에는 김사월, 곽푸른하늘, 고상지ㆍ이자원 등 8팀이 참여했다. 인디 밴드의 음악을 영화화한 ‘라이브플래닛시즌 2’(2011)의 권철 감독이 연출했다.
'존버' 극장에서 '존버'들이 만든 음악영화
제작비 5000만원 정도의 초저예산 영화임에도 질 높은 음악영화다. 최고은은 "취지에 공감한 극장 측, 오래된 인연의 음악인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밴드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 멤버이자 이 영화의 PD로 후반 작업 등을 챙긴 황현우는 "감사한 대관료에 음악인들의 섭외료는 평소의 30% 미만 정도였다. 음향은 사실 비용에 비례하지만 컴퓨터로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는 시대가 됐고, 거기에 노력을 갈아 넣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영혼만 찾고 과정과 방법은 마음대로 하는 것 별로 안 좋아한다. 영혼도 퀄리티도 챙겨야 한다. 산업화로 빨리, 급하게 해야 하는 게 많아졌지만 우리는 마음에 들 때까지 수정할 수 있었다. 그런 생활 태도에도 버틴다는 느낌이 있다. 사회에서도 좀더 기다려 준다면 다들 퀄리티가 높아지지 않을까"는 뼈있는 말을 남겼다.
낡고 촌스러워 보이는 것들의 진득한 힘을 보여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8팀의 얼굴이 들어간 간판이 극장 앞에 내걸리는 모습이다. 영화는 지난해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한국 경쟁 부문에 초청돼 작품상을 받았다. 11월 1일 개봉. 64분. 전체 관람가.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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