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갈등이 심각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갈등이 심각하다기보다는 제대로 갈등하지 못하고 있다는 표현이 맞겠다. 이해관계가 다르고 생각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세상에 갈등은 항상 존재하는 것인데, 갈등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절히 표출하고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에서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
후쿠시마 원전수 방류, 의대 정원 증원 등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생길 때마다 유사 종교 수준의 ‘진영 논리’에 맹목적으로 휩쓸리다 보니 입장에 따라 말과 주장이 정반대로 바뀌는 블랙 코미디 같은 상황이 자주 등장한다. 이념이란 사람의 정체성을 구분하는 많은 요소 중 하나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우파냐 좌파냐로 스스로와 상대방을 낙인하고 편 가르고 있다. 각자가 사안마다 판단하고 결정하는 스스로의 권한과 능력을 진영에, 아니 정확히는 양극단의 유튜버들에게 맡기고 종교처럼 따르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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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 파괴 수준의 이념·정치 갈등
갈등 표출·해결 능력에 심각한 문제
‘나도 변화하겠다’는 유연성이 필요
‘다른 편’과의 소통이 신뢰의 첫걸음
」
갈등 관련 조사마다 우리나라의 심각한 수준이 드러난다. 전국경제인연합회(현재 한국경제인협회)에서 2021년 발표했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비교에서 한국은 정치·경제·사회 분야의 전 영역에서 세 번째로 갈등이 심각했다. 그에 앞서 진행됐던 연세대 보건복지연구실의 전국 규모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약 90%가 ‘우리 사회의 갈등이 심각하다’고 생각했고, 가장 심각한 갈등으로는 정치적·이념적 갈등을 꼽았다. 또한 우리 사회 갈등을 심화시키는 가장 큰 원인으로 갈등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정치권을 꼽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갈등 문제가 인간과 사회를 파괴하고 있다. 갈등으로 고통받을 때 인간은 끊임없는 위협감으로 두려움과 불안을 느껴 두뇌 에너지가 고갈돼 인지적 능력을 잃게 된다. 갈등으로 인한 위협으로 옳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인간의 능력이 손상되고, 그로 인해 다시 갈등이 깊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영국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의 “인간을 구원할 유일한 방법은 협력이다”는 말이 절실한 시대다.
갈등 문제가 심각해질 때마다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곤 한다. 통합은 사회 구성원이 생각과 가치를 공유함으로써 사회에 소속감과 결속감을 느끼게 됨을 말한다. 그러나 통합이 잘못 사용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소통과 존중 없는 통합은 다른 이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나에게 동화되기만을 강요하곤 한다. ‘나 역시 변화하겠노라’는 유연성을 갖추지 못한 통합 시도는 ‘나에게만 맞추라’는 강요가 될 수 있다. 또 다른 형태의 파시즘이다.
건강한 통합은 사회적 신뢰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 신뢰는 ‘같은 편’만 아니라 ‘다른 편’을 포함한 사회 구성원 모두와의 신뢰다.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사회적 신뢰와 재난 극복 사이의 관계에 대한 미국 하버드대 이치로 가와치 교수와 리사 버크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재난 자체의 강도보다 사회가 어떻게 대응했느냐가 피해 복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 핵심은 사회적 신뢰의 정도였다. 오랫동안 지역 주민들 간에 협력 활동을 하고 유대감을 나눠온 지역에서는 자발적 구조 활동이 잘 이뤄지고 정확한 정보가 공유되며 빠른 회복이 진행됐다. 또한 다른 집단과 자주 접촉하며 사회활동의 신뢰 경험을 쌓은 지역은 폭력을 조장하는 선동이나 가짜뉴스에 흔들리지 않고, 평화를 지키며 재난을 극복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의 열린 만남과 소통이 만든 힘이다.
‘사회적 신뢰’가 사람을 보호했다는 결과에서 다시 우리의 현실을 되새긴다. OECD 최근 통계에 따르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신을 도와줄 이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우리나라의 점수는 OECD 38개국 중 밑에서 4번째일 정도로 낮았다. 우리보다 낮은 나라는 튀르키예·멕시코·콜롬비아뿐이다. 게다가 도와줄 이가 단 한 명도 없다고 응답한 박탈 지수는 18.8%에 이른다.
사회 갈등에 대처하기 위한 사회적 신뢰를 쌓으려면 공정한 제도와 문화, 교육 등 많은 것이 필요하지만, 가장 근본이 되어야 할 것은 공존과 협력에 대한 태도다. 시간이 걸리고 노력이 투입되더라도 끊임없이 소통하고 이해하고 설득하는 것이 시작이다.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는 인터넷의 시대에 우리는 정말 마음을 열고 소통하고 있는가? 오히려 갇힌 정보망 속에서 비슷한 의견만 반복하며 편협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아프리카의 오랜 격언이라 알려진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하지만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라는 당연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잠시 빨리 가려 한다면 혼자서 가는 게 편하고 쉬운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사회 앞에 놓인 길은 멀고도 멀다. 해결해야 할 과제와 장애물도 많은 먼 길이다. 그 먼 길을 함께 가야만 한다. ‘함께’는 다른 의견을 가진 다양한 모두를 포함하는 말이다.
송인한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 리셋 코리아 보건복지분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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