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세종의 귀염둥이 막내아들, 왕실판 ‘사랑과 전쟁’

2023. 10. 20.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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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응대군과 세 아내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경기도 시흥시 군자봉 기슭에는 영응대군과 세 아내의 묘소가 있다. 대군과 두 아내를 합장한 하나의 묘와 한 아내의 단독 묘로 이루어진 쌍분 형태다. 묘주는 600여 년 전인 1430년대에 태어나 짧게는 33년, 길게는 80년 가까이 살다 간 사람들이다. 죽은 지 오백 수십 년이 된 사람들이다. 영응대군의 묘소는 다른 집안의 조상 묘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묘석에 새겨진 네 사람의 면면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역사적 이야기를 생성한 자들이다. 지금 여기 누워있는 영응대군과 그 아내들인 여산 송씨, 해주 정씨, 연안 김씨는 누구이며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

“끝까지 막내 챙겨라” 세종의 유지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영응대군 묘소. 오른쪽 무덤에 대군과 정실부인 두 명이 함께, 왼쪽 무덤에 측실이 잠들어 있다. [사진 전주 이씨 영응대군파종친회, 해주 정씨 종가, 문화재청]

영응대군 이염(李琰·1434~1467)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8남 2녀 막내로 태어났다. 늦둥이 아들이 온화한 성품과 총명한 기상에 글씨와 그림, 음률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자 아버지 세종은 체모(體貌) 따윈 안중에 없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너는 15세가 될 때까지 나를 아버지라 부르고 상(上)이라 하지 말라.”(‘영응대군신도비명’) 다른 대군에게는 어림도 없는 주문이다.

「 글·그림·음악 빼어나 세종이 총애
두 번의 강제 이혼과 은밀한 통정

‘사인사색’ 사랑, 그 안의 돈과 권력
단종·세조까지 얽힌 ‘가문의 대결’

살아서 얼굴조차 피했던 세 여인
남편과 함께 한 곳에 묻힌 사연은…

영응과의 일화는 성군(聖君) 세종도 어쩔 수 없는 ‘한 인간 아버지’임을 보여준다. 세종은 영응을 시양(侍養)했거나 영응에게 글을 가르친 사람이면 넉넉한 재물과 파격적인 벼슬로 응답했다. 그런 세종을 보고 김흔지는 영응의 등신불을 만들어 바치는데, 이 일로 승지에 임명되자 사람들은 그를 ‘등신승지’로 불렀다.(『문종실록』 2년 3월 22일)

세종은 자신의 사후에도 이 아들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도록 ‘몸채가 높고 넓으며 사랑과 행랑이 연이은, 궁궐에 비등한’ 저택을 짓는 한편 내탕고의 보물은 몽땅 영응의 것으로 못 박는다. 세종은 영응의 나이 11살이 되자 간택으로 여산 송씨를 배필로 정한다. 그런데 송씨는 혼인 4년 만에 병(病)을 구실로 이혼을 당하는데, 시아버지의 눈밖에 난 것이다. 다시 전국을 뒤져 영응의 배필을 찾지만 결국 가까이 있던 자신의 형수이자 효령대군의 부인 정씨의 친정 조카를 선택하여 아들의 재혼을 성사시킨다. 몇 달 후 세종은 영응의 아내 해주 정씨의 남동생 정종(鄭悰)을 세자(문종)의 사위로 영입하는데, 영응의 미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쫓겨난 첫 부인 ‘여산 송씨’의 복귀

위에서 내려다본 영응대군 부부와 후손들의 무덤. 대군 무덤 아래로 아들 청풍군, 손자 화림군 묘소 등이 있다. [사진 전주 이씨 영응대군파종친회, 해주 정씨 종가, 문화재청]

영응이 새집에서 새 부인과 생활한 지 반년 남짓, 세종은 막내아들의 사저 동별궁에서 눈을 감는다. 그런데 4년 사이 왕실의 주인이 문종에서 단종으로 바뀐 어느 날, 영응의 견평방(현재 인사동 일대) 저택 안주인 해주 정씨는 국왕이 내린 이혼장을 받게 된다. 춘성부부인(春城府夫人) 정씨에게 봉작한 사령장을 거두고 영응의 부인으로 송씨를 다시 봉한다는 것이다.(『단종실록』 1년 11월 28일) 그동안 영응대군은 전 부인 송씨와 잠통(潛通)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조정 신하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문벌의 후예인 정씨를 배필로 삼아 잘살아 왔는데 까닭 없이 내보내는 이유”를 따지거나 “선왕이 거부한 송씨가 아닌 명족(名族)에서 다시 뽑을 것”을 제안한다. 때는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의 측근을 제거한 계유정난 직후라는 점에서 이 이혼이 시사하는 바가 가볍지 않다. 이혼당한 정씨는 단종과 경혜 공주의 측근이고, 재결합하게 된 송씨는 세조 측근이라는 점, 정씨와의 이혼 반대가 단종을 지키려는 사육신 계열에서 나왔다는 점도 흥미롭다.

남편 죽자 돈과 권력 차지한 첫 부인

영응대군의 신주를 모신 사당 경효사(敬孝祠). [사진 전주 이씨 영응대군파종친회, 해주 정씨 종가, 문화재청]

재결합에 성공한 송씨는 대방부부인(帶方府夫人)에 봉작되어 영응대군의 저택으로 들어와 거만(巨萬)의 부와 권력을 행사한다. 부왕이 사랑한 아들이라는 이유로 세조는 아우 영응을 각별히 예우하고, 송씨는 그 관계를 백분 활용한다. 송씨는 자신의 친정 조카를 단종의 비(정순왕후 송씨)로 들이는가 하면, 왕실 행사에 부부의 저택을 제공하고 미래 권력인 어린 왕자들을 솔선하여 양육한다.

성종과 연산군도 왕자 시절에 이 집에서 자랐다. 국중 거부로 이름난 영응대군이 33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자 그 재산은 송씨 차지가 되었다. 권력과 재물에 탁월한 감각을 가진 송씨의 행보는 영응대군 사후 더 활발해지는데, 왕실을 등에 업고 송사 중인 재산·전답·노비 등을 차지하고, 왕실 재산인 답십리의 채전(菜田)과 양천의 초장(草場)을 불하받는 방식이다.

명문가 출신의 측실 ‘연안 김씨’

경북 성주군에 있는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胎室). 영응대군 것도 포함됐다. [사진 전주 이씨 영응대군파종친회, 해주 정씨 종가, 문화재청]

영응대군은 측실 연안 김씨에게서 1남 2녀를 얻는다. 영응과 김씨의 혼인에는 후사를 얻도록 한 세조의 안배가 보인다. 상대가 대군이라 해도 측실의 지위는 한계가 있는 데다 승부욕과 질투심이 유난히 강한 정실 송씨는 버거운 존재였을 것이다. 영응대군도 송씨를 두려워하여 누군가에게 베풀고 싶어도 송씨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그나마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죽을 무렵의 영응이 몸에 지니고 있던 패물을 아들 청풍군에게 건네주자 송씨가 도로 빼앗아 그 일부만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예종실록』 1년 10월 6일)

활발한 행보를 보인 정실부인에 가려져 있지만 측실 김씨야 말로 명족(名族)의 후예다. 김씨의 조부는 개국공신 김로(金輅)이고, 부친은 계유정난의 공신 김영철이다. 숙부 김영륜은 민무질의 사위로 태종의 처족이고 그녀의 외가 또한 명문거족이다. 조선 초기 명족으로 내외친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연안 김씨 집안은 된서리를 맞는데, 부친이 세조 초기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권력의 측근이란 집안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집안을 몰락시키기도 한다는 사실은 역사 속의 다양한 사례가 말해준다.

이혼당한 둘째 ‘해주 정씨’의 재산

1451년 영응대군 둘째 부인 해주 정씨가 어머니 민씨로 부터받은 상속 문서. [사진 전주 이씨 영응대군파종친회, 해주 정씨 종가, 문화재청]

이혼당한 해주 정씨는 그 후의 삶 60여 년을 어떻게 살아냈을까. 자녀를 남기지 않아 영응대군과의 인연이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는데, 왜 그녀는 전 남편 곁에 묻혀 있는 걸까. 스스로를 ‘영응대군기별부인(永膺大君棄別夫人)’이라 칭한 정씨는 상속 문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기별(棄別) 40년이 지난 1494년(성종 25)에 정씨는 친정 조카 정미수(鄭眉壽, 남동생 정종과 경혜 공주의 아들)에게 자신의 재산 일체를 분급하고, 다시 15년이 지난 1509년(중종 25)에는 유루분(遺漏分)까지 상속한다.

두 차례에 걸쳐 조카에게 상속한 정씨의 재산은 부모로부터 받은 노비 115구와 자신이 살던 낙선동의 기와집 1채, 그리고 양주와 면천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논 163마지기다. 문서에는 노비의 이름과 나이, 거주 장소를 상세히 밝혀 놓았다.

해주 정씨는 “너(정미수)는 나에게 유일한 동성 삼촌(三寸) 조카로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어 내가 어머니 같을 뿐 아니라 나도 죽은 후 의탁할 데가 없다”고 하고, 일체의 가재(家財)를 남김없이 준다고 썼다. 그리고 정씨는 “젊은 나이에 홀로 살며 모든 일을 오로지 살아가는 것을 바랄 뿐이었다. 내가 죽은 후에 너의 사당에 붙여주길 바란다”고 한다.

300년 뒤에 복권된 ‘해주 정씨’

영응대군 영정. [사진 전주 이씨 영응대군파종친회, 해주 정씨 종가, 문화재청]

노비의 가옥 안에 있는 텃밭까지 관리한 정씨의 기록을 보면 자기 소유의 전민(田民)에 대한 애착이 그녀를 살게 한 동력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상속 문서는 조부 정도공 정역(鄭易)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친정 사당에 있어야 할 정씨가 전 남편 영응대군 집안으로 다시 돌아온 사연은 한 편의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17세기 말에 기록된 『선원록』을 근거로 18세기 영조 대에는 해주 정씨를 영응대군의 원배(元配)로 돌려놓는 복작(復爵) 운동이 일어나 당시 대리청정을 하던 사도세자의 승인을 받게 된다. 『선원록』의 정보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어찌 되었건 해주 정씨의 뜻과는 별개로 그녀는 이씨 문중의 일원이 되었다.

측실 후손이 주도한 추숭 작업

영응대군 신도비. [사진 전주 이씨 영응대군파종친회, 해주 정씨 종가, 문화재청]

영응대군의 입장에서 볼 때 세 아내는 어떤 의미를 남겼을까. 먼저 영응대군의 추숭과 기억의 역사는 연안 김씨 소생 청풍군 이원(1460~1505)과 그 후손들이 주도하였다. 반면에 영응대군의 물질적 유산은 송씨 소생의 길안현주와 사위 구수영이 차지했다. 조선의 권문세족 능성 구씨 가문은 영응대군의 저택과 세종의 내탕고에서 나온 것이다.

아쉽게도 구씨의 계보에서 영응대군과 여산 송씨의 존재는 사라지는데, 조선사회 유교화에 따른 당연한 결과다. 즉 “부(父)의 부(父)를 거슬러 올라가 백세(百世) 위에 닿더라도 내 조상인 줄 알지만 모(母)의 모(母)를 거슬러 올라가면 삼세(三世) 이상은 누가 누군지 알지 못하는” 구조다.

각기 다른 곳에 묻혀 있던 영응대군과 세 아내가 후손들에 의해 군자봉 기슭에 다시 모였다. 살아서는 대면조차 꺼리던 세 여성이 가족의 이름으로 함께 있는 이곳에서 그녀들의 영혼은 편안하신지.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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