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각수의 한반도평화워치] 경제·외교 존재감 키우는 ‘글로벌 사우스’와 관계 강화해야
미·중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서방 중심의 ‘글로벌 웨스트’와 중국·러시아가 주축인 ‘글로벌 이스트’에 속하지 않는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신흥국·개도국들인 ‘글로벌 사우스’가 부상하고 있다.
최근 이를 상징하는 두 개의 회의가 개최되었다. 지난 8월 말 남아공에서 개최된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공) 정상회의에서는 20여 개 신청국 중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이란, 아프리카의 이집트·에티오피아, 중남미의 아르헨티나를 신규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9월 초 인도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도 인도 주도로 아프리카연합(AU)이 국제기구 회원으로 가입하여 유럽연합(EU)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앞서 인도는 지난 1월 글로벌 사우스 화상 정상회의를 개최하여 글로벌 사우스의 목소리를 모으는 작업도 주도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미·중 패권 경쟁으로 진영화가 깊어지는 가운데 글로벌 사우스가 제3극으로서 국제사회에서 존재감을 높여가고 있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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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무대서 신흥·개도국 부상
미·중에 맞서 독자 행보 강화
한국은 개도국 경험 등 살려
중층적 외교 그물망 구축해야
」
인도, 쿼드 국가면서 대러 제재는 불참
포스트 탈냉전 시대를 맞아 미·중 대립은 격화되고 있지만, 이미 높아진 상호의존도나 탈세계화 한계를 고려하면 지금 상황을 ‘철의 장막’으로 분리되었던 냉전 시대로 돌아가는 ‘신냉전’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오히려 양측이 각자 영향력 확대를 위해 다양한 짝짓기를 꾀하고 있어 ‘구멍 뚫린 죽의 장막’으로 비유되는 ‘유사 냉전’의 모습을 보인다.
냉전 시대 개도국들은 동서 대치 상황에서 외교에서는 비동맹, 경제에서는 77그룹을 결성하여 독자적 위치를 추구했었다. 그러나 식민제국주의에 대한 정서적·이념적 반발을 공통분모로 하여 소극적 의미의 비동맹과 신경제질서 창출을 주장하는 데 그쳐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최근 글로벌 사우스가 세계화에 힘입어 ‘나머지의 부상(rise of the rest)’을 이루면서, 선진국은 경제적으로 침체하고 신흥국·개도국은 성장하는 ‘남고북저(南高北低)’ 현상이 나타났다. 경제력과 외교력을 갖춘 글로벌 사우스는 강대국 정치로부터 전략적 자율성을 발휘하면서 실력으로 국제무대 역할을 늘려가고 있다. 그리고 냉전 시대의 비동맹이라는 소극적 태도에서 복잡한 네트워크를 추구하는 다중 연합이라는 적극적 자세로 바뀌었다. 쿼드의 일원이면서도 대러 제재에는 동참하지 않는 인도, 브릭스 회원국이면서 대러 규탄에는 동참한 브라질, 중·러와의 경제 관계가 깊지만 반미에는 소극적인 남아공, 유럽과 러시아 간 줄타기 외교를 하는 터키, 미국 안보에 의존하면서도 중국·러시아와 함께 이란 수교와 유가 상승을 추구하는 사우디 등의 행태에서 이런 자율성과 적극성을 엿볼 수 있다.
글로벌 사우스, 서방에 대해 불만
이런 현상은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 대응에서도 잘 나타난다. 상당수의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유엔 특별총회에서 러시아 침략 규탄과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다. 총 6개 결의 중 4개는 140여 개국, 2개는 90여 개국 지지에 그쳤다. 유엔 헌장과 국제법을 명백히 위반한 침략이지만, 이에 대한 결의에 반대·기권·결석한 회원국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은 국제사회의 파편화 현상을 보여준다. 여기엔 글로벌 사우스 국가 다수가 러시아의 무기·석유·가스에 의존하는 현실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서방에 대한 이들의 불만도 작용하고 있다. 서방의 식민 지배 경험, 서방 가치 외교의 이중적 잣대, 자신들이 참여하지 않는 가운데 만들어진 기존 국제질서에 대한 거부감, 기후변화·팬데믹·개발원조에서 서방의 자기중심적 행태와 지원 부족, 다자 금융기구에서의 대표권 부족, 서방의 경제 제재에 대한 우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앞으로 글로벌 사우스는 6개국의 신규 가입으로 존재감과 함께 ‘반(反)서방’의 상징적 기치를 높인 브릭스를 중심으로 움직일 것이다. 브릭스 확대는 인도와 브라질의 소극적 태도 속에 중국 주도로 성사된 점에서 중국에 유리한 전개다. 다만 브릭스는 정치 성향 차이, 경제 발전 격차,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의 고립, 중국·인도 대립, 인도·브라질의 중국 주도 경계 등으로 서방 그룹의 핵심인 G7의 응집력과 영향력에는 뒤진다. 또 인도네시아·베트남·방글라데시·튀르키예·멕시코·나이지리아 등 중견 국가들처럼 브릭스 틀 밖에서 활동하는 국가들도 있다. 그럼에도 서방과 중·러가 경쟁적으로 구애하면서 전략 가치가 상승함에 따라 글로벌 사우스는 국제질서 변화에 주요 변수가 되고 있다.
글로벌 사우스 활용하는 지혜를
최근 시크 지도자 암살 사건의 배후를 둘러싼 캐나다와 인도가 분쟁을 벌이고 있지만, 캐나다와 같은 ‘파이브 아이즈’ 국가인 미국·영국·호주·뉴질랜드는 캐나다를 돕지 않고 있다. 인도를 의식한 탓이다. 러시아가 강력한 서방 제재에도 경제를 운용해 나가는 것도 글로벌 사우스라는 출구로 제재를 우회하기 때문이다. 뉴델리 G20 공동성명이 러시아 비판 수위를 낮춘 문안을 채택한 것도 글로벌 사우스를 끌어안으려는 서방 노력의 일환이다. 이렇듯 글로벌 사우스는 양측 갈등을 역이용하여 쌍방으로부터 이익을 추구하는 동시에 서방을 압박해 국제 문제에서 자기들의 입장을 반영하려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결 교섭을 놓고 사우디·인도네시아·튀르키예가 각각 중재에 나서는 것도 이런 추세를 반영하고 있다.
우리도 미래 경제 성장의 동력이자 자원 공급망의 핵심으로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외교를 강화할 때다. 개도국 개발 경험, 무역 국가로서 형성한 네트워크, K-문화 등을 활용하면 서방 국가들과 다른 우리만의 독특한 외교가 가능할 것이다. 초불확실성의 시대에 중층적 외교 그물망 구축이 대외 의존적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안전망이다.
신각수 법무법인 세종 고문·전 외교부 차관·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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