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팔레스타인 사태와 일본의 ‘균형외교’

이영희 2023. 10. 20.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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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도쿄특파원

요즘 팔레스타인 사태에 대한 일본의 대응을 유심히 보고 있다. 미국이 깃발을 올리면 질세라 보조를 맞추던 우크라이나 전쟁 때와는 사뭇 달라서다. 지난 8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자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X(트위터)에 민간인을 희생시킨 하마스의 공격을 “강하게 비난한다”고 썼다. 하지만 뒤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모든 당사자에게 최대한의 자제를 요구한다.” 주요 7개국(G7) 의장국을 맡고 있는 일본이지만 미국·영국 등이 9일 발표한 이스라엘 지지 공동성명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는 선택을 했다.

지난 16일 도쿄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열린 이스라엘의 군사 작전 반대 집회. [EPA=연합뉴스]

이후 가미카와 요코(上川陽子) 외상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자치정부 외에 요르단·아랍에미리트연방(UAE)·이집트·카타르·사우디아라비아·이란 외교당국자와 잇따라 전화 회담을 가졌다. 기시다 총리도 18일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 셰이크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카타르 군주,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하얀 아랍에미리트 대통령과 연이어 통화하며 상황을 논의했다. 중동 지역에 일본 정부 특사를 파견하고, 미국보다 앞서 가자 지구에 1000만 달러(약 135억원)의 긴급 인도 지원을 하겠다고 밝혔다. “쌍방과의 관계를 강화해 사태의 빠른 수습에 힘쓴다”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부여해 분주히 움직이는 모양새다.

일본 언론이 ‘밸런스(균형) 외교’라고 표현한 이런 태도의 뒤에는 국익이 있다. 일본은 지난해 기준 원유의 94%를 중동 지역에서 수입한다. 이 지역의 안정은 일본의 자원 안보와 직결되며, 따라서 “미국과의 동맹을 기축으로 하면서도 중동 문제는 독자적인 색깔을 낼 수밖에 없는”(니혼게이자이신문) 상황이다. 이를 위해 일본은 오랜 기간 중동 각국과 관계를 촘촘히 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이미 1977년에 일본 도쿄(東京)에 대사관 역할을 하는 팔레스타인대표부(당시 이름은 PLO 도쿄사무소)가 문을 열었고, 1998년 가자 지구에 일본 출장주재관사무소를 만들었다가 2007년 이를 라말라로 이전했다.

중국의 존재감이 커지는 중동에서 일본의 이런 중재 노력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겠냐는 비관론도 나온다. 하지만 격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국익을 중심에 두고, 주요 액터로서 역할을 찾아가는 모습에서 일본 외교의 노련함을 발견한다. 사태 초반 “하마스의 공격은 국제인도법을 명확히 위반한 강력한 테러 행위”라는 입장을 낸 후 입을 닫고 있는 한국과 비교되는 지점이다. 한 외교전문가는 “한국이 G8에 이름을 올리기에 아직 부족한 이유”라고 했다. 허투루 넘기기 힘든 지적이다.

이영희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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