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낳기만 하면 잘 돌봐준다" 비혼 OK, 라떼파파 흔한 이 나라
지난 7월말 들른 프랑스 파리 16구의 한 공립 어린이집. 이곳에선 백인부터 흑인·아시아인까지 다양한 인종, 생후 2개월 지난 갓난아기부터 3세 유아까지 57명이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보육을 받는다. 바닥을 기지 못할 정도로 어린 갓난아기도 많았다. 급식비를 제외한 수업료는 무료다.
어린이집 부원장 오드 블린(49)은 “공식적으로는 어린이집이 여름 방학 기간이라 쉬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맡겨야 하는 학부모를 위해 문을 열었다”며 “프랑스에선 ‘아이는 부모가 낳지만, 키우는 건 사회가 함께한다’는 생각이 강하다”고 말했다. 이어 “(부모가)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맡기는 게 아니라, 정말 잘 돌봐주기 때문에 갓난아기부터 어린이집에 맡기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경고한 슈링코노믹스(shrink+economics·축소경제)에 대응하기 위해 주요 선진국은 한국보다 먼저 발빠르게 움직였다. 지난해 합계 출산율 1.8명을 기록한 프랑스가 대표적이다. 프랑스는 유럽·북미 등 주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출산율 1위다. 한국의 출산율(0.78명)의 두배 이상이다. 프랑스 국립통계경제연구소(INSEE)에 따르면 전체 가족의 21%가 자녀 수 3명 이상 다자녀 가구다.
프랑스는 가족의 합산 소득을 가족 수로 나눠 1인당 소득세를 매기는, 일명 ‘n분의 n승’ 과세 방식을 적용한다. 누진세율을 적용하는 소득세 특성상 자녀가 많을수록 유리한 세율을 적용받는다. 비혼(非婚)·동거를 통해 출산한 자녀에 대해서도 육아휴직부터 각종 수당까지 결혼 자녀와 같은 혜택을 준다. 그 결과 비혼을 통한 출산이 60% 이상이다.
파리에서 만난 비혼 워킹맘 샤를린 줄리(48)는 “동거한 뒤 자녀를 먼저 낳고, 필요하면 결혼을 하는 것이 보통”이라며 “나와 지금 동거인은 각각 자녀 1명씩을 데려와 함께 키운다”고 말했다.
지난 8월 스웨덴(출산율 1.52명) 스톡홀름 시내 곳곳에선 유모차를 끌며 공원을 걷고, 아기 띠를 메고 버스를 타는 ‘라떼 파파(latte papa·커피를 손에 들고 유모차를 끄는, 육아에 적극적인 아빠)를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스웨덴은 자녀 1명당 육아휴직을 최대 480일까지 쓸 수 있고, 부모 한쪽이 반드시 90일을 써야 하는 ‘육아휴직 할당제’를 1995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출산 직후 1년간 엄마가 육아휴직을 쓰고, 이후 아빠가 휴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부가 멍석을 깔아줬지만, 회사도 적극적이다. 중공업 회사 아틀라스콥코에서 일하는 라떼 파파 야콥 보르예손(36)은 “자녀가 태어날 때마다 최소 7개월에서 최대 9개월씩 육아휴직을 세 번 썼다”며 “회사로 돌아온 뒤에도 근무 시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고 말했다. 스웨덴인과 결혼한 육아휴직 9개월차 워킹맘 예주영(34)씨는 “임신 사실을 회사에 알리자 회사 인사팀에서 먼저 나서 육아 관련 혜택을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라고 권해 안심됐다”고 말했다.
육아휴직 기간 소득 대체율도 높다. 육아휴직을 쓰는 240일 중 195일은 기존 급여의 80%를 받을 수 있다. 기업에 따라 복지 차원에서 10%를 더 얹어 급여의 90~100%까지 보장해주는 경우도 있다. 나머지 45일에 대해선 하루 180크로나(약 2만2000원)를 받는다. 니클라스 뢰프그렌 스웨덴 사회보험청 대변인은 “육아휴직 제도를 마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육아하는 아빠’ 캠페인을 벌이는 등 사회 문화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데 집중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한국에선 육아휴직 급여를 통상임금의 80%까지 줄 수 있다. 다만 상한액이 월 최대 150만원이다. 근로자 평균 월급(388만원) 대비 실질 소득대체율이 39% 수준이다. 스웨덴(410만원·78%)ㆍ일본(317만원·67%)에 비해 절반 이하다. 그나마 과거 대비 나아진 수준이다.
한국보다 일찌감치 저출산·고령화를 경험한 일본(출산율 1.27명)은 최근 슈링코노믹스 대응에 부쩍 적극적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6월 발표한 저출산 대책엔 ‘차원이 다른’이란 수식어까지 붙였다.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수식어만큼이나 다소 파격적인 정책까지 실험 중이다.
도쿄에서 약 30㎞ 떨어진 지바현 나가레야마는 지하철역 맞은편에 ‘송영(送迎) 보육 스테이션’을 운영한다. 일종의 ‘어린이집 정류장’이다. 출근하는 부모가 아이를 맡기면 셔틀버스 5대가 시간에 맞춰 보육원에 아이들을 내려준다. 퇴근 시간 무렵엔 보육원을 돌면서 아이들을 다시 이곳으로 데리고 온다. 일이 늦게 끝나는 부모를 위해 오후 9시까지 운영한다. 하루 이용료는 100엔(약 900원), 한 달 이용료는 2000엔(약 1만8000원)이다.
다케다 에마 스테이션 원장은 “지하철역 2곳의 보육 스테이션에서 나가레야마시 전체 보육시설로 셔틀버스를 운행한다”며 “출퇴근 시간대 자녀를 챙기기 어려운 부모를 위해 지하철역 근처에 보육 스테이션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설명했다.
출산율 2.95명으로 일본 지자체 1위를 기록한 오카야마현 나기마을은 대표적인 실험장이다. 지난달 15일 들른 이곳에선 은퇴한 할머니·할아버지가 마을 자녀를 돌봐주는 ‘나기 차일드 홈’을 운영하고 있었다. 1주일에 3~4번씩 생후 10개월 딸과 나기 차일드 홈에서 시간을 보내는 츠카야마(27)는 “원하면 언제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도 있지만, 마을 어르신과 엄마·아빠가 함께 아이를 돌보는 차일드 홈 분위기가 좋다”고 말했다.
최슬기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선진국과 비슷한 수준의 ‘하드웨어(시설·제도)’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하드웨어를 넉넉히 품을 ‘소프트웨어(환경·문화)’를 갖추지 못하면 슈링코노믹스의 가속화를 늦추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최근 한국도 슈링코노믹스 대응에 나섰지만, 여전히 저출산 대책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장기전에 대비해 선진국식 저출산 대책을 펴되, 이미 현실로 성큼 다가온 슈링코노믹스 현실에 대처할 ‘연착륙’ 해법이 필요하다. 이상림 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방을 시작으로 슈링코노믹스로 접어든 현실부터 인정하고, 줄어든 인구로 경제 효율성을 높이는 대책을 마련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며 “저출산·고령화 대책의 한 축을 슈링코노믹스 대응으로 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연구위원은 이민 정책을 예로 들며 “당장 인력이 부족하다고 특정 직종의 저숙련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데 집중하기보다, 산업 구조조정 청사진에 따라 다양한 숙련도의 외국인 노동자를 다양한 직종에 수혈하는 식으로 대책의 시야를 넓혀야 한다”고 조언했다.
경제가 ‘저출산 쇼크’로 쓰러지지 않도록 지방대를 구조조정하고(교육), 지자체 행정체계를 통폐합하고(지방), 미래 먹거리 위주로 경제 구조를 재편(산업)하는 등 사회 전반에서 변화가 필요하다는 얘기도 나왔다.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일차적 수준의 저출산 대책에 머물지 말고 정해진, 곧 다가올 미래에 대응할 수 있도록 도시 설계, 주택 정책, 교육 시스템 등 사회 체계 전반을 뜯어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자녀가 있는 가구와 혼인 부부에 대한 세제 지원을 확대해 다자녀가구를 장려하고 유인해야 한다는 조언도 있다. 임동원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혼인 세액공제’와 혼인 비용에 대한 증여세 비과세 특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다자녀 가구를 우대하기 위해서는 ‘n분의 n승제’와 자녀 세액공제·교육비 세액공제 인상 등 혜택을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파리·스톡홀름·오카야마=김기환·나상현·정진호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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