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과수밭에는 사람들이 묻혀 있다
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기자말>
[김영희 기자]
[다시 만날 그날까지⑥] 극단적 선택·월북·보육원... 한 가족에게 남겨진 불우한 단어들(https://omn.kr/25z80)에서 이어집니다.
발굴지는 상문리 274번지(아랫법륜골)와 상문리 312번지(웃법륜골), 까치골 3군데다. 이곳은 문산읍과 진성면을 잇는 고개로 진성고개, 문산고개, 애대고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 2번 국도에서 150m 들어가면 발굴장 옆에 있는 비닐하우스 |
ⓒ 김영희 |
월아산(해발470m)과 장군봉(해발482m)의 산으로 단절되어 있어, 문산읍과 진성면을 이어주는 통로는 진성고개가 유일하다. 고개의 가장 높은 지점이 해발 128m인데, 문산 쪽 골짜기는 비교적 완만하고 긴 반면, 진성 쪽은 짧고 가파른 편이다. 문산읍은 남강지류인 영천강 주변에 펼쳐진 작은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 진성고개 웃법륜골, 아랫법륜골, 가치골 매장지 원경 |
ⓒ 김영희 |
▲ 진성고개 아랫법륜골 매장지 근경 |
ⓒ 김영희 |
1960년 4.19혁명 후 유족회 운동이 전개되자 <영남일보> <대구일보>에는 '한국전쟁기 학살사건에 대한 보도'가 줄을 이었다.
유족들의 기세에 눌려 이승만 하야 후 자유당도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를 만드는 작업에 들어간다. 하지만 학살 사건을 관장한 경찰국장이나 국회의원 등이 현직에 근무하고 있었던 터라 조사는 가해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뤄졌다. 이에 유족들은 전국적으로 조직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유족들의 입을 틀어막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자를 '빨갱이'로 취급하고, 각 지역 유족회장 등을 감옥에 수감한다.
살벌한 분위기에 40여 년간 조용히 지내던 이들은 1999년 9월 <AP통신>의 '노근리 민간인 학살사건' 보도를 계기로 2000년 1월 20일 '경남유족대책위원회(대책위)'를 결성한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25일부터 29일까지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대책위는 같은 해 3월, 마산역에서 대대적인 위령제를 거행한다. 당시 경남 곳곳에서 관심 갖기 시작하면서 학살지의 증언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후 2004년 5월 3일, 경남대 발굴팀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지인 마산 여양리 발굴 상황이 언론에 보도되자, 경남 서부지역 내 학살지를 알고 있거나 학살당한 자의 유족들이 가슴 속에 품었던 응어리를 풀고 제보에 나선다.
이상길 교수는 이들의 증언과 대책위에서 제보한 11군데의 매장지에 대해 사전 조사를 실시, 자료를 참고로 발굴 대상을 선정한 후 작업을 시작하였다. 발굴이 시작되고 해당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문산읍에 거주하던 이봉춘 할머니도 발굴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 할머니는 "우리 밭(상문리 274번지, 아랫법륜골)은 왜 빠졌노!" 하면서 아들에게 전화해 진실화해위원회에 알리라고 한다. 진성고개는 처음 조사에서 제외된 곳이었으나 할머니의 제보를 통해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봉춘 할머니를 찾아 나서다
이상길 교수의 논문에는 '이봉춘 할머니를 오랫동안 기억해야 한다'는 글이 남겨져 있었다. 이에 필자는 이 할머니를 찾아뵙기로 마음먹고, 일부 유족분들께 근황을 여쭤봤다. 돌아온 답변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돌아가셨어요."
"치매 걸리셨어요."
'정말 돌아가셨으면 어떡하지'하는 마음이 조급해졌지만 문제는 할머니가 과수원 소유자라는 것 외에 집도, 전화번호도, 주소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일단 몸으로 부딪쳐 보기로 하고, 무작정 진성고개(아랫법륜골) 발굴장을 찾아갔다. 발굴지는 거의 사람이 다니지 않는 묘한 골짜기에 위치해 있었다.
▲ 2번 국도에서 150m 들어가면 발굴장 옆에 있는 비닐하우스 |
ⓒ 김영희 |
사실 발굴장을 혼자 가는 건 쉽지 않다. 겁이 났지만, 할머니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골짜기 쪽을 바라보았다. 저만치 비닐하우스 안에 한 남자가 거름을 흩고 계셨다. 안심되는 순간이다. 한숨을 돌리고 인사를 건넸다. 잠시 후 아저씨가 하우스 안에서 나오셨다.
"민간인 학살지 유해 발굴 다니는 김영희입니다. 혹시 이봉춘 할머니를 아십니까?"
"제가 아들입니다."
"정말입니까? 할머니께서 좋은 일을 하셨다길래 제가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할머니를 찾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할머니의 근황을 전혀 모르는 상태라 아드님이 어떤 마음인지 몰라 걱정이 되었다.
걱정과 달리 아드님은 친절하게 자신의 전화번호와 할머니의 전화번호, 문산 할머니 댁 주소와 약도를 그려주셨다.
"지금 집에 혼자 계시니 찾아봬도 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진성고개 발굴지에서 차를 돌렸다. 이봉춘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할머니 댁 앞 텃밭에는 마늘과 파, 양파, 당근, 상추 등이 가지런히 심겨 있었다. 할머니의 차분하고 꼼꼼한 성격이 느껴졌다.
현관문 앞에서 할머니를 불렀다. 인기척은 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귀가 좀 어둡다'는 아들의 조언에 따라 할머니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제야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필자가 "할머니 문 좀 열어주세요" 하니 문이 드르륵 열렸다.
'어디서 왔냐'는 할머니의 물음에 "진주서 왔다"며 방 안으로 들어가 인사하길 청했다. 이후 할머니랑 따뜻한 방에 마주 보고 앉았다.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그때가 12년 전이지' 하면서 할머니가 기억을 더듬어 나가셨다. 할머니가 책장에서 4권의 책을 갖고 나오셨다. 진성고개 발굴보고서와 산청 외공리 보고서 등이었다.
▲ 이봉춘 할머니와 그가 작성한 서예 |
ⓒ 김영희 |
1936년 6월 29일생인 이봉춘 할머니는 경남 산청군 금서면에서 1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태릉참봉(泰陵參奉)'을 지낸 김상규 공의 장녀다. 이후 할머니는 20살에 남편 김윤기와 결혼, 5남 1녀의 자녀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할머니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참봉 가문의 자녀'라서 그랬나 보다.
할머니는 자녀를 모두 출가시킨 후 학문에 뜻을 품어 한학과 서예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전국 서예대전에서 상을 받는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내가 한국전쟁 때 15살이었어. 우익 편은 이승만, 좌익 편은 김일성이었지."
할머니는 보도연맹에 관한 내용도 잘 알고 계셨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분위기를 설명하며 말을 이어 나가셨다. 필자가 15살 때 저렇게 총명하게 기억했을까 싶을 정도로 똑똑해 보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1982년경 과수원을 만들기 위해 진성고개(아랫법륜골)에 있는 산을 매입하였다. 당시 산주(山主)께서 이곳에 매입한 땅 부지 한가운데에 매장지가 있다고 알려주셨다.
그 말을 듣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장지를 그대로 남겨 놓고' 다른 곳에만 과수원 나무를 심기로 했다. 할머니는 선량한 농민들이 억울하게 끌려가 학살당했다는 걸 짐작하고 계셨다.
"조상 모시는 입장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영혼들을 달래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것이 사람의 도리니깐.
여름철에 장맛비가 장대처럼 쏟아지면 유해가 쓸려내려 갈까 봐 벌초도 못 했어. 장마가 물러가는 매년 늦가을쯤에 했지. 벌초 후 수확한 과일 한 박스와 막걸리, 꽃 등을 올렸어. 억울한 영혼들 오셔서 드시라고.
하루는 아들이 매장지 위에 있는 벚나무를 베어버리자고 하더라고. 근데 내가 묘지에 꽃나무가 있으면 좋으니 그냥 두라고 했어. 할아버지도 돌아가시면서 나한테 부탁했어. 매장지가 언젠가는 발굴이 될 것이니 그때까지 잘 관리해달라고."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두 분 모두 정말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갖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장지 매입 후 과수를 심기 위해 밭을 둘러보는데 정말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어. 큰 나무를 보면서 '시신의 피와 살을 먹고 자라 저렇게 컸을까' 생각했어. 주위 사람들에게 소나무를 베어가라고 했더니 가지 하나 남기지 않고 가져가 버리더라고. 땔감이 많이 필요할 때라 서로 가지고 가려 했지."
할머니 소나무 사연을 듣고 필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나무는 총부리 쏘는 소리처럼 콩 볶듯이 타타타탕! 앞에 육신은 난자된 채 검붉은 선혈 흘러 핏빛이 여명을 헤치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노라! 보았노라! 느꼈노라!'라고 묵묵히 바라보며 서 있었을 것이다.
8화 진성고개 편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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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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