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서에 소송까지… 잘 나가는 대학병원 교수들이 ‘과장’ 자리에 목매는 이유

전종보 기자 2023. 10. 19. 16:3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007년 방영된 드라마 <하얀거탑>은 병원에서 벌어지는 권력 암투를 긴장감 있게 그려내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극중 장준혁 교수(김명민)는 실력만큼 권력을 중요시하는 인물로, 각고의 노력 끝에 외과 과장 자리에 오른다. 그는 자리에 집착하는 자신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친구 최도영 교수(이선균)에게 “인생관의 차이야. 넌 실력을 갖춘 것에 만족하지만 난 아니야. 난 둘 다 원해”라고 말한다. / 사진=MBC
“절대 과장 시키지 말라고 투서도 많이 들어와요. 갈라치기도 있고, 어휴…” -前 대학병원 병원장
“임상과장 선임은 전임 과장과 병원장의 결정이 중요해요. 결국 정치입니다.” -현직 대학병원 교수

의사에게 병원은 직장이다. 어느 직장에든 ‘자리 욕심’을 가진 이들은 있는 법이다. 누군가에겐 보직과 승진이 월급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대학병원 교수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임상과장과 같은 보직에 전혀 뜻이 없는 교수들이 있는 반면, 의학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어떻게든 한 자리를 맡으려 애쓰는 교수들도 있다. 병원장 투서에 소송전까지, 일반 직장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다는 후문도 들린다.

◇뒤에서 밀고 앞에서 끌고… 병원은 작은 정치판
회사에 업무별 팀이 있듯 병원에도 진료과목에 따라 임상과가 나눠져 있다. 병원에 가면 볼 수 있는 외과, 내과, 신경과, 소아청소년과 등이 모두 임상과다. 임상과장은 한 개 임상과를 총괄하는 의사다. 외과엔 ‘외과 과장’이 있고, 내과엔 ‘내과 과장’이 있다.

임상과장 선임 절차는 병원마다 조금씩 다르다. 상급종합병원의 경우 대개 병원장이 과장 후보를 제청(提請)하면 의료원장 또는 재단이사장 등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임명한다. 임기는 대부분 2년이며, 과 상황에 따라 연임하기도 한다. 임상과장이 되기 위한 연수나 시험이 있진 않다. 보통 나이 또는 학번·경력 순으로 돌아가며 과장을 맡는다. 다음 차례인 교수가 거절 의사를 밝히거나 다른 보직을 맡고 있어 과장 직 수행이 어려운 경우, 해당 교수가 인격적·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엔 순서를 건너 뛸 수도 있다.

소규모 과는 그럴 일이 없지만, 인원이 많은 과에서는 드물게 연배가 비슷한 교수들끼리 물밑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흔히 말하는 ‘라인’이 만들어질 때도 있다고 한다. 병원장이 후임 임상과장 후보를 정할 때 전임(현재) 임상과장의 입김이 적지 않게 작용하는데, 전임 과장이 후임 후보 중 한 사람을 밀어주면 전임에서 후임, 그 아래까지 이어지는 라인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병원 조직이 ‘작은 정치판’ 같다는 이야기는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서울 소재 모 대학병원 A교수는 “병원마다 다르겠지만, 병원장 뜻에 의해 임상과장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며 “정치와 비슷하다. 병원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임상과장도 달라진다”고 말했다. 그는 또 “병원장이 주변 사람들의 평판, 특히 전임 과장의 이야기를 많이 듣기 때문에 전임 과장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인사·재정권 손에 쥔 임상과장, 과 안에서 막강한 힘 지녀
한국 사회에서 대학병원 교수 정도면 굳이 임상과장을 하지 않아도 대부분 지위와 명성을 얻는다. 과장에게 특별 수당이 나오긴 하지만, 이 역시 경쟁을 벌여 쟁취해야 할 만큼 큰 액수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애써 과장 자리에 오르려는 걸까.

임상과장은 임상과의 수장이다. 인사, 재정을 비롯한 과의 모든 행정권을 쥐고 있다. 적어도 과 안에서는 권력이 막강하다. 해당 과 교수의 채용·승진에 과장의 힘이 크게 작용하며, 중요한 회의를 주관하고 과별로 배정되는 운영비를 어떻게 쓸지 결정하는 것도 과장의 몫이다. 임상과장이 과에서 사용할 약제·의료장비를 결정하는 병원의 경우, 제약사, 의료기기회사 등 외부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크다. A교수는 “하다못해 휴가 하나를 쓸 때도 과장에게 승인권이 있어 눈치를 보게 된다”며 “이것 자체가 권력을 상징하는 거다”고 말했다. 대학병원장 출신 B의사 또한 “‘과장에 따라 식사 메뉴가 바뀐다’고 말할 정도로 큰 병원에서는 임상과장이 상당한 힘을 갖는다”며 “책임도 많지만, 그만큼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다”고 했다.

‘과장’이라는 직책 자체가 갖는 의미도 무시할 수 없다. 임상과장은 사실상 혼자서 소속 교수와 전공의, 인턴, 간호사 등 많게는 100명이 넘는 조직을 이끈다. 쉽게 얻을 수 없는 경험이고 경력이다. 병원장, 센터장 등 자리 욕심이 있는 교수들에겐 과장 자리가 위로 올라가는 첫 관문이 되기도 한다. 자리 욕심이 없다고 해도, 자신의 차례가 된 교수 입장에서는 과장 자리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앞서 설명했듯 과장은 보통 차례대로 맡으며, 다음 차례인 교수가 거절하거나 다른 보직을 맡은 경우가 아니면 ‘해당 교수가 인격적·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어 평판이 안 좋은 경우’에만 차례를 건너뛰기 때문이다.

◇상대 후보 떨어뜨리려 고소까지… 이전과 달리 서로 미루기도
상황이 이렇다보니 일부 병원에서는 과장 자리를 두고 교수 간에 크고 작은 충돌도 빚어진다. 보통 원치 않은 인물이 연임하거나 선임됐을 때, 또는 후배나 타 대학 출신 인물이 차례를 건너뛰고 과장이 됐을 때다. 파벌을 형성해 대립하고 특정 후보의 여론을 안 좋게 만드는가 하면, 직접 병원장을 찾아가 과장 선임에 반대한다는 탄원을 넣기도 한다. 병원 이미지를 생각해 가급적 내부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갈등이 봉합되지 않을 땐 직권남용이나 횡령배임, 명예훼손 등 내부 정보를 이용해 소송을 거는 경우도 있다. 이 역시 임상과장이 교수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 관련 소송 경험이 있는 한 변호사는 “상대 후보의 비위행위를 신고하거나 형사고발을 통해 과장 후보에서 배제시키는 사례도 있다”며 “진위 여부를 떠나 논란이 제기된 것만으로 결격 사유가 될 수 있다는 병원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이용한 것으로, 사후에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져도 상대방 입장에서는 훼손된 이미지를 되돌리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물론 모든 대학병원 교수가 과장 자리를 탐내는 건 아니다. 규모가 작은 과나 임상과장의 힘이 약한 병원에서는 서로 과장 자리를 미루기도 한다. 과거와 비교하면 과장에 대한 인식 또한 많이 바뀌었다. 이전에는 임상과장을 막강한 힘을 가진 자리나 출세 등용문처럼 여겼다면, 지금은 ‘귀찮은 자리’, ‘시간 뺏기고 희생해야 하는 자리’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임상과장이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던 과거와 달리, 요즘 과장은 독단은커녕 다른 과원들 눈치 보기 바쁘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A교수는 “임기 동안 욕만 먹고 끝나면 사람들과 사이만 나빠지고 하나도 남는 게 없다”며 “자리 욕심이 있지 않은 이상 커리어를 위해 수술·연구·진료에 집중하고 싶어 하지, 굳이 책임과 희생을 감수하면서 과장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맥 위주 선임이 문제… 리더십과 능력 갖춘 인물 필요”
병원 내 권력 암투를 목격하거나 경험해본 의사들은 능력이 아닌 인맥 중심의 현행 선임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객관적 근거가 아닌 전임 과장, 병원장과 같은 소수 인물의 주관적 뜻에 따라 임상과장이 결정되다보니, 계속 ‘라인’이 만들어지고 비정상적 경쟁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과장이 되지 못한 교수 입장에서는 명확한 이유가 없으면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렵고, 과원들 또한 자신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채 과장이 선임될 경우 탄원과 같은 방법을 쓰게 된다. A교수는 “과 발전을 위해서라도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지 말고 객관적인 근거와 능력을 기준으로 과장을 선임할 필요가 있다”며 “소수의 특정 인물이 아닌, 함께 일하게 될 과원들의 의견을 폭넓게 들어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실제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나이보다는 연구 업적과 같은 객관적인 자료와 행정 능력, 교육 능력, 외부 평판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임상과장을 선임하는 경우가 많다. 외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외부에서 영입되는 의사가 많고 임기, 역할 등에도 차이가 있어 단순 비교는 어려우나, 인맥이 아닌 ‘능력 위주 인재 선임’이라는 대원칙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 개 과 살림을 도맡는 임상과장에게는 개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리더십과 포용력, 소통능력 등이 인맥 못지않게 중요하다. B의사는 “임상과장은 일이 많은 자리다. 봉사해야지, 군림하려 해선 안 된다”며 “가장 중요한 건 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과원들에게는 여기저기 눈치 보지 않고 과를 대표해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본인이 원하고 능력만 있다면 젊은 사람이 하거나 한 사람이 여러 번 하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며 “능력을 기준으로 보다 유연하게 선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Copyright © 헬스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