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날의 행복과 도둑맞은 가난 사이의 불행
[배운기 기자]
국가총생산이나 국민총소득이라는 대외적 통계로 보면, 우리는 결코 가난하지 않다. 우리나라의 2022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는 3만2886달러로, 1953년도 66달러에 비해 70년 만에 500배 증가한 수치다.
국제통화기금에 따르면 2022년의 우리나라 구매력평가지수(PPP)를 반영한 1인당 국내총생산은 5만3736달러로 일본의 4만9044달러보다 9.6% 정도 더 높다. 이는 우리나라의 국민이 일본 국민보다 그만큼 더 많은 풍요와 여유를 누리며 산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는 평균의 함정일 뿐 체감하는 상대적 빈곤의 수치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모두가 배곯았던 절대적 가난이 어느 정도 해소된 반면 상대적 빈곤의 정도는 더 높아졌고, 공동체 붕괴와 함께 가족과 연대의식은 더 희미해졌다.
각개전투와 각자도생이 일상화된 지금, 가난은 점차 개인의 능력과 잘못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정치적 의제가 민생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사회일수록 구조적 가난은 개인의 삶속에 천착된다.
현실의 가난과 달리 우리 문학속의 가난에는 낭만과 감동이 있었다. 세 부부의 얘기로 유명한 '가난한 날의 행복'은 김소운의 수필이다. 교과서에서 실렸던 이글은 가난보다는 참다운 행복과 사랑에 포커스가 있었던 에세이다. 작가의 문장과 감성 속에서 피어난 가난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고, 독자들은 오래가는 감동의 여운을 얻었다.
생존 서바이벌 게임에 내몰린 사람들
여기, 인생 막장에 서거나 빚에 쫓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 경제적 약자들은 실존 서바이벌 게임에 뛰어든다. 주최 측은 거액의 상금(456억 원)을 내걸고, 참가자들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이 게임은 단 한사람만 살아남아 상금을 승자 독식하는 생존게임이다. 게임과 규칙은 주최 측이 정하고 그 종목은 우리의 향수를 자극한다. 딱지치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구슬치기, 달고나 뽑기, 줄다리기, 징검다리 건너기, 오징어게임까지.
▲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포스터 |
ⓒ Netflix |
이 스토리는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을까? 오징어게임은 무엇을 상징하고 주최자와 참가자 캐릭터는 우리 사회의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이 블랙코미디 속에 숨어있는 수사적 코드는 무엇이었을까?
드라마 속의 각종 게임은 우리의 삶 자체가 생존을 목적으로 견디어야 할 다양한 경쟁이다. 탈락자는 결국 죽는다는 상황은 우리가 전쟁터에 살고 있음을 말해준다. 평온해야할 삶의 터전이 경쟁과 생존만을 위한 정글이라는 암시는 디스토피아적 절망에 가깝다. 친근한 게임을 도구로 사용한 것도 생존을 위한 경쟁과 위험이 우리 일상임을 일깨워준다.
게임 주최 측은 막강한 힘과 부를 가진 이들이다. 게임에 참가한 다양한 약자들은 그들에게 오락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은 쓰다 버리고 대체할 수 있는 소비재로서의 부속물. 어쩌면 자본주의적 정의는 이렇듯 부의 불평등을 이념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불편한 현실에서 온다. 평온한 중산층을 꿈꾸지만 막상 집 한 채 마련하기 힘들고, 신분상승을 위해 죽어라 일하지만, 월급 빼고는 다 오르는 시대를 살아가는 숙명을 가진다.
게임 참가자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 중 금수저나 은수저 계층은 없다. 실패를 거듭해 인생 막장에 있거나 경제적으로 한계 계층에서 생활고를 겪는 이들이다. 결국 오징어게임은 경제적 궁핍에 몰린 채무자들에게 인생 한방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스토리일 수밖에 없다. 여러 극적 재미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감정이입을 통해 흥행할 수밖에 없었던 각박한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유감스럽다.
'도둑맞은 가난'의 시대가 오고 있다
오징어 게임의 폭력은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의 욕망을 훔치고 이들의 이전투구를 게임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있다. 부자들은 자신들의 권태를 벗어나기 위해 혹은 자신들의 삶을 다채롭게 하기 위해 가난한 자들의 가난함 자체를 탐내기도 한다.
오징어게임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가난을 도둑맞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들의 열망은 '아무도 모르게, 수치심 없게'라는 간절한 바람으로 나타난다. 가난한 사람들이 평범한 희망을 품지 않는 시대에는 누구나 오징어게임을 꿈꾼다.
개인적으로 가난의 문학적(예술적) 계보학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괭이부리말 아이들, 오징어게임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조세희의 소설(1978년)로 대다수가 가난한 절대적 가난을 그렸지만, 그때는 그나마 끈끈한 공동체 의식이 존재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김중미의 소설(2000년)로 다수가 상대적으로 가난하지만, 이때부터 공동체와 가족이 붕괴되어 가난의 개인화가 시작됐다.
반면 넷플릭스 드라마인 오징어게임(2021)은 가난이 혐오의 대상이 되고 가난이 내면화되어 상품화(체험과 생존게임의 대상)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오징어게임의 설계와 핏빛 즐거움은 부자들을 쾌락을 위한 것이다. 박완서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의 또 다른 버전이다. 이 소설은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2023년에도 유효하다.
나쁜 부자들의 오락을 위해 없는 이들의 생사가 결정되는 시대. 누군가의 가난이라는 상처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훈장이 되는 시대. 우리는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을까? 긍정적인 답을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되도록 착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개인의 동의, 공동의 규칙(법률), 평등, 참여로 귀결되는 정치체제는 무엇일까? 이는 초등학생들로 다 아는 민주주의의 요체들이다. 하지만 동의가 있다고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다고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여나 형식적 민주주의라는 외피 안에 다른 무언가가 들어있지 않을까?
어쩌면 오징어게임의 폭력성과 잔혹성은 민주주의적 조건으로 인한 결과물이지 않을까. 형식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오징어게임은 개인들의 동의에 의해 참여하고 공동의 규칙에 결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생뚱맞은 질문이지만... 정의는 기회의 평등에 있을까? 아니면 결과의 평등에 있을까?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은 어떤 이유든 간에 경제적 파탄에 처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게임은 통해 지금까지의 없던 기회를 얻거나 기회를 제대로 잡지 못했던 이들에게 공평하게 부여된 기회다. 과연 정의는 답할 수 있을까?
오징어 게임은 자본주의적 가난의 메타포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주는 철학적 함의는 무엇일까? 자본주의와 소시민의 삶, 경제적 파산이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물론 사회공동체와 개인들의 절망과 희망의 코드와 법과 제도의 부실이라는 실망의 코드도 당연히 내장되어 있다.
그렇다고 현실의 삶은 스토리 속의 주인공처럼 낭만적 재미와 고통 속의 감동, 아름다운 결말을 쉽게 내어주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에서 도피하고아픈 충동과 좌절의 공포를 느끼며 살아간다. 나아가 비정한 게임의 세계에 유혹을 느끼기도 전에 자신의 삶을 저버리는 이들도 많다.
가난한 이들의 공포와 무력감을 상품으로 치장할 때 도둑맞은 가난은 '박완서의 소설'이 된다. 그 속에 숨은 은유와 부자들의 욕망은 현실에서 다양한 '오징어게임'으로 나타난다. 가난마저 박탈당하는 이들이 느껴야했던 절망감은 부자들의 무료한 삶을 다채롭게 만드는 회전목마가 된다. 회전목마는 어린 아이들을 즐겁게 했던 것처럼 화려하게 빛나며 부자들의 놀이가 된다.
자신의 청춘을 유보하고 결혼과 내일을 미루고 절박한 현실에 얽매이는 이들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두워진다. 더욱이 젊다는 이유로 청춘들의 빚과 부담을 줄여주는 데 있어 우리의 법과 제도는 지극히 소극적이다. 우리 사회가 이러한 청춘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갖춰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이들에게서 가난마저 훔치는 나쁜 손이 아니라 성장을 돕는 착한 손길이 필요한 까닭이다.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이 회생파산 신청을 했다면?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오징어게임 참가가 중 상당수가 회생법원을 방문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들이 서바이벌 게임이 아닌 회생법원에 개인파산신청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법과 제도를 비롯한 사회적 시스템이 경제적 약자를 위한 구제절차를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모든 이들이 이를 이용할 수는 없다. 개인파산면책 제도의 경우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들이 이를 통해 채무를 탕감 받는 것은 제한적일 것이다.
예를 들어 선물거래로 큰 손실을 입은 참가자(상우)의 경우에는 면책불허가 사유인 사해행위에 해당되어 면책이 허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법원에 의한 재량면책의 여지는 있기 때문에 기사회생의 가능성은 여전히 잔존한다.
그렇다고 오징어게임이나 청춘파산의 주인공처럼 개인의 힘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미담이 되라고 권유할 수도 없다. 현실 속 개인의 삶은 가공된 얘기보다 훨씬 더 극적이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더더욱 개인이 의도한대로 스토리보드를 짤 수도 원하는 결말을 만들어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현실의 고통을 구제하는 제도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문턱을 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왜 이런 제도를 활용하지 않고 저런 극단적인 수단을 선택했는가를 묻는 것은 타인에게 무례한 일이 될 수 있다. 저마다의 상황과 인식에 기반을 둔 판단(과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둑이나 우리의 삶이나 훈수는 쉽고 직접 꾸려나가기는 어렵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특히 청춘들에게 빚과 부담이 고통으로 누적될수록 우리 사회의 미래 청사진도 어두워질 것이다. 지금처럼 잘 살고 있는 기득권에 편중된 각종 사회제도와 약자를 배려하지 못하는 사회안전망은 제2의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과 제3의 청춘파산의 주인공들을 양산할 뿐이다. 청춘들을 위한 사회안전망과 제도적 고민이 절실한 때다. 드라마 오징어게임 시즌 2가 문을 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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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회생법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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