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이순신·세종대왕 옆에 이승만 동상? 윤 정부의 의도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독재자 논란에도 지난 6월 16일 기습적으로 세워진 이승만 트루먼 동상 제막식이 7월 27일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열렸다. |
ⓒ 조정훈 |
추진위원회 회장에는 3선인 변정일 전 의원이, 고문으로는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이사장인 황교안 전 총리, 뉴라이트전국연합의 간판이었던 김진홍 목사, 대표적인 식민지근대화론자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대한민국헌정회 의장이자 국민의힘 상임고문인 목요상 전 의원 등이 추대됐다고 언론에 보도됐다.
출범식에서 변정일 회장은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해서 아직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고, 오히려 독재자이며 조국 분단의 원흉처럼 알려지고,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아 안타깝다", "억울한 오명을 벗기고 그의 위대한 업적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도의이며 건국 대통령에게 보답하는 것이 될 것이다"라는 말로 동상 건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추진위원회는 "이 전 대통령의 동상을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에 세워야 한다는 판단하에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과 함께 광화문광장에 건립하기 위해 제반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들의 동상과 나란히 이승만 동상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도 있었다. 전광훈 목사의 경우에는 광화문광장을 이승만광장으로 바꿔 부르며 이승만의 기독교 입국론을 찬양하고 있다.
그에 비해, 윤석열 정권하에서 벌어지는 지금의 흐름은 심상치 않다. 국가보훈부의 응원하에 이승만기념관 건립 운동이 진행되고 있고, 2017년에 제작된 뒤 건립 장소를 찾지 못하던 이승만·트루먼 동상이 지난 7월 27일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제막됐다. 윤 정부가 이승만·백선엽을 앞세워 역사전쟁을 벌이고 있으므로, 광화문광장에 이승만 동상을 건립하려는 시도는 과거 어느 때보다 힘을 받게 됐다.
한국 지배를 상징하는 공간
그런데 살아생전의 이승만은 자기 동상이 경복궁 광화문 앞이 아닌 서울 남산 위에 세워지기를 희망했다. 광화문광장이 지금만큼의 상징성을 갖지 못했던 그 시절에는 남산의 위상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까지의 남산은 그 이후인 박정희 집권기의 남산과 확연히 달랐다. 박정희 시절에는 독재 정치와 정보 정치의 본산인 중앙정보부 청사가 남산의 이미지를 좌우한 데 비해, 1950년대까지는 남산의 이미지에서 일제 식민지배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남산은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 주둔지였다. 구한말부터는 일본의 한국 침략이나 한국 지배를 상징하는 공간이 됐다. 일본공사관이 남산 기슭에 들어서고, 지금의 충무로인 남산 밑 진고개에 일본인 타운이 형성됐다.
조선신궁·남산대신궁(경성신사)·노기신사도 세워졌다. 임진왜란 당시의 군대 주둔지에는 왜성대공원이 들어섰다. 을사늑약 이후의 한국통감부와 이를 뒤이은 조선총독부도 한동안 남산에 있었다. 통감 관저와 총독 관저도 마찬가지다. 이를 통해 남산은 행정적·종교적 측면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상징하는 공간이 됐다.
그에 더해 군사적 의미도 농후했다. 남산과 맞닿은 용산에는 일본군 사령부가 있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의 남산은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의 남산이 근접할 수 없는 압도적 이미지를 풍겼다.
고층 빌딩이 없어서 남산이 훨씬 멀리까지 보였던 일제강점기에는 남산이 갖는 그 같은 이미지가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인식됐다. 그런 시대가 지나간 직후였기 때문에,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까지는 남산을 물들인 일제 식민지배의 이미지가 대중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 1956년 8월 17일 자 <경향신문> 기사 "공사비 이억육백만환 남산의 이대통령동상제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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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시절에 이승만이 남산 조선신궁 터에 세운 것이 이승만 자신의 동상이다. 조선신궁은 일본 왕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한국 침략의 총지휘자인 무스히토 일왕(메이지 일왕)을 받드는 신전이었다. 이곳에 이승만 동상을 세운 것은 이 동상으로 일본 신들을 억누른다는 의미도 있었겠지만, 이 터가 풍겼던 한국 지배자의 이미지를 차용한다는 의미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대통령 제80회 탄신 경축 중앙위원회'가 세운 이 동상은 1956년 광복절에 3부 요인들과 각국 외교사절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제막됐다. 동상 규모도 세계적이었다. 동상 사진과 함께 실린 그해 8월 17일 자 <경향신문> 기사는 "10여 개월에 걸쳐 7만여 명의 인원과 총공사비 2억 6백만 환이 소요된 것이며, 높이 81척에 건립 부지 3천여 평을 차지하고 있다"고 묘사했다
일제 패망으로 일본 신사들이 철거된 상태에서 높이 25미터인 현직 대통령의 초대형 동상이 우뚝솟음으로써 남산의 이미지는 크게 달라졌다. 2015년 <도시연구: 역사·사회·문화> 제13호에 실린 김대호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의 논문 '20세기 남산 회현 자락의 변형, 시각적 지배와 기억의 전쟁'은 이렇게 평한다.
"남산에 들어선 거대한 이 동상은 남산의 경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사람들의 시각과 기억에서 조선신궁을 완전히 대체하는 효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남산이 동상의 시대에 접어드는 것은 이승만 동상의 기억의 잔존 효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일제 때만 해도 남산은 일본 신궁과 신사들의 공간이었다. 그랬던 곳에 훗날 안중근·김구 동상이 들어서게 된 계기가 이승만 동상 건립이었다는 설명이다.
이승만이 헌법 규정을 무시하는 사사오입 개헌으로 대통령 3선을 가능케 한 시점은 한국전쟁 휴전 이듬해인 1954년이다. 그해 11월 29일 3선 개헌안이 공포됐다. 이로써 장기집권의 길을 터놓은 뒤인 1955년 10월 3일에 이승만 동상 기공식이 있었다. 그해 개천절에 기공하여 이듬해 광복절에 제막된 이 동상은 이승만이 군주의 길을 걷고 있음을 알리는 상징물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승만 동상은 조선신궁이 갖고 있던 대중적 영향력을 이승만 독재에 활용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무스히토 일왕의 기운을 억누른다는 의미도 있었다. 이럴 가능성에 대비해 일본이 1945년 패망 직후에 미리 조치해둔 것이 있었다. 조선신궁의 신령을 조선 땅에서 하늘로 올려보내는 괴상한 의식이었다.
광복절 특집 기사인 1970년 8월 19일 자 <조선일보> 기사는 1945년 8월 16일 총독부 관계자 회합에서 '조선신궁을 비롯한 전국 신궁·신사에서 신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승신식을 거행한다'는 방안이 채택됐다고 설명했다.
이 의식은 해방 직후의 한국인들에 의해 조선신궁 등이 훼손될 가능성과 더불어 훗날 그 터에 새로운 시설이 들어설 가능성에 대비해 '우리 신들은 더 이상 여기에 없다'는 메시지를 남기는 이벤트였다. 조선신궁 터에 이승만 동상이 제막되기 11년 전에 총독부가 이런 일에 대비해 신들을 미리 대피시켰던 것이다. 신궁이나 신궁 터에 대한 한국 측의 조치로 인해 일본인들이 받게 될 심리적 상처를 미리 완충해 두는 조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이승만을 광장으로 소환하는 이유
자기 동상을 남산에 세울 생각을 할 당시의 이승만과 그 측근들은 이만저만 뻔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민주공화국 이념을 무시하는 3선 개헌을 강행했을 뿐 아니라 서울시의 명칭까지 이승만의 기분에 맞춰 바꾸려 한 정황이 있을 정도다.
1956년 1월 7일, 이승만의 호인 우남을 서울시의 새로운 명칭으로 선호하는 의견이 가장 많다는 수도명칭조사위원회의의 발표와 함께 이 방안이 국무회의에 보고된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8월 25일, 29세의 김영삼 의원이 UPI 기자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우남이라는 그의 호에 따라 서울의 명칭을 우남시로 변경하려 하고 있다"고 지적한 사실이 보도됐다. 이승만 동상 건립 추진과 함께 나온 이 일은 이승만과 그 측근들이 민주공화국 이념을 얼마나 가벼이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금 광화문광장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려는 세력이 단순히 이승만을 기릴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 게 아님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한국을 더욱 우경화시키고 과거의 냉전체제를 회귀시킬 목적으로 이승만을 광장으로 소환하고 있다.
살아생전의 이승만이 남산에 동상을 세운 것은 독재체제를 한층 강화할 목적에서였다. 살아 있는 이승만의 동상을 남산에 세운 것과 죽은 이승만의 동상을 광화문광장에 세우려는 것의 공통점은 이런 것들이 민주공화국 체제를 약화시킨다는 점이다. 남산의 이승만 동상처럼 광화문광장의 이승만 동상도 한국 사회의 퇴보를 상징하는 물건이 될 수밖에 없다.
남산의 이승만 동상은 1960년 4·19 혁명 뒤에 쓰러졌다. 그해 8월 25일 자 <조선일보> 기사는 동상 철거 사진과 함께 "독재자 이승만 씨의 동상도 독재자의 말로 못지않을 정도인 산산조각으로 철거되기 시작하였다"라며 "24일 하오에는 독재자 이승만 씨의 동상의 한쪽 팔이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실황을 중계했다.
민주공화국 파괴를 상징하는 남산의 이승만 동상은 제막식 4년 뒤에 결국 철거됐다. 세종대왕·이순신과 함께 광화문광장에 이승만을 나란히 세우려는 시도 역시 해피엔딩으로 귀결되기는 힘들다. 민주공화국 이념과 시대 흐름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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