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쇼핑에서 배워야 할 제목의 기술
사는이야기 담당 편집기자로 일하며 더 좋은 제목이 없을까 매일 고민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더 돋보이게 하고, 글 쓰는 사람들이 편집기자의 도움 없이도 '죽이는 제목'을 뽑을 수 있도록 사심 담아 쓰는 본격 제목 에세이. <편집자말>
[최은경 기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멍때리는 시간에 종종 홈쇼핑 채널을 본다. 일을 끝내고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한 뒤 휴식하는 시간에, 열일하는 쇼핑호스트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정신 사나운 소음에 가까운 화면을 멍하니 바라본다.
▲ 홈쇼핑은 독자의 감정을 흔드는 말을 사용할 때가 많다. |
ⓒ elements.envato |
안타깝게도 홈쇼핑을 보면서 물건을 사는 일은 극히 적다. 다만 감탄한다. 말 진짜 잘해. 사람 홀리는 재주가 많아. 이러니까 사람들이 사지. 안 사고 배기겠나.
"방송이 끝나면 이 모든 혜택은 없습니다! 여러분! 곧 매진 됩니다. 브라운 컬러 고민인 고객님들, 서두르셔야겠어요, 마감 임박입니다, 지난번 방송에서 전부 매진, 전회 매진, 시간 많지 않습니다. 2분 남았나요? 서두르세요. 다음 방송 없습니다. 준비한 수량, 곧 끝납니다, 미룰수록 남는 건 후회뿐, 지금이 가장 쌉니다..."
빨라지는 말의 속도만큼 내 심장도 같이 뛰는 것 같다. 쇼핑호스트들의 말만으로는 매진에 닿기가 2% 부족한지 긴박한 효과음도 빵빵 등장한다. 마감 시간도 깜빡깜빡, 시곗바늘도 재깍재깍이다. 지금 당장 사지 않으면 싸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날리기라도 할 것처럼. 한 골이라도 더 넣기 위해 밀도 있게 압박 수비 들어가는 축구선수들마냥.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표현인데... 내가 제목으로 쓴 문장들과 비슷하잖아!
독자의 감정을 흔드는 말
쇼핑호스트들은 감정에 호소할 때가 많다. 제품에 따라서는 실험 결과를 근거 자료로 삼거나 언론 보도 내용을 보여주거나 하는 등 소비자의 이성적인 판단에 호소할 때도 있다. 하지만 시늉일 뿐, 대부분은 즉각적인 반응 즉 소비를 끌어낼 만한 멘트를 자주 사용한다. 앞서 언급한 말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편집기자인 내가 쇼핑호스트와 비슷한 표현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 했다고? 그게 뭘까? 바로 이런 거다.
- 인삼만큼 좋다는 가을 무... 그냥 지나칠 수 없어요
- 대구에서 찹쌀수제비 주문하신 분, 놀라지 마세요
- 강릉 가시는 분들, 4월 지나면 이거 못 먹습니다
- 군산의 분식, 유재석님 이거 꼭 먹어야 합니다
어떤가. 쇼핑호스트들의 목소리가 음성지원 되는 것 같지 않나? 다시 말하지만 이건 홈쇼핑 방송 멘트가 아니고 기사 제목이다. 가을 무의 효능을 '강조'하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거라고 독자의 '관심을 유도'하고, 그냥 찹쌀수제비가 아닌 '대구 찹쌀수제비'라는 '차별성'을 두면서 '왜 놀란다'는 건지 독자의 '호기심'을 노린 문장이다.
의도가 없는 문장은 제목에 없다. 어찌 보면 제목은 글쓴이 혹은 편집기자가 쓰는 고도의 노림수에 가깝다. 어떻게든 독자를 끌어당기고 보려는.
이번엔 여행 상품을 소개하는 홈쇼핑 방송 내용을 보자.
"지금 채널 돌리신 분들, 돈 버신 겁니다. 오늘 방송 아니면 이 가격에 절대 못 삽니다. 지금 결재하시는 거 아니에요. 지금은 전화 예약만. 전화 예약만 해도 추첨을 통해 상품 드려요. 그냥 지나칠 여행 상품이 절대 아닙니다. 이 가격으로 12월 여행 성수기 상품 절대 못 떠나요. 놀라지 마십시오. 4박 5일에 3만 9900원으로 OO을, 저가 항공 아니고요, 국적기로 가시는 겁니다..."
쇼핑호스트의 말에서 뭔가 '긴급함'이 느껴진다. 듣는 입장에서는 쫓기는 것 같은 마음도 든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바로 결재하는 게 아니라니까 안심도 되면서 생각할수록 가성비도 훌륭하다고 여겨진다. 부담 없이 한번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제목들은 어떤가.
- 지금 안 사면 1년 뒤... 슈톨렌 예약에 성공하다
- 지금 다운로드 받으세요,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 작년에만 5만 명... 지금 못 보면 1년을 후회합니다
- 장담합니다, 이 마음 5천 원으로 절대 못 삽니다
앞선 문장들이 주는 효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안 사면'이라고 하니까, 당장 사야 할 것 같은 '긴박감'이 느껴지고, '작년에만 5만 명'이라고 하니까, 나만 빠진 것 같아 불안한 마음도 든다. 동시에 나도 한번 경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당장' 사야 하고, 나도 '5만 명'에 포함되고 싶은, 그게 뭔지 클릭해보고 싶은 마음이 차오른다. 그래서 글을 읽게 되었다면 정확히 내가 의도한 대로, 이끈 대로 넘어온 셈이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 글의 내용에서 벗어나거나 자극적인 내용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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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독자를 유입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로 쇼핑호스트들이 쓰는 말처럼 긴급함을 주거나,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표현 등을 쓰면서 다소 과장하는 표현 방법을 소개하고 있지만 그제 전부인 양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글의 내용에서 벗어나거나 자극적인 내용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독자에게 반감을 살 만한 문장이라면 다시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저 더 많이 팔려고 작심한 것처럼 보이는 홈쇼핑 업계도 자체적으로 옴부즈맨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등 과대·허위 제품으로 소비자들을 현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지켜야 할 선을 어겼을 때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제재도 받는다. 당연히 글도 그래야 한다. 글의 제목은 반드시 내용을 토대로 한, 격에 맞는 문장이어야 한다. 특히나 공적인 글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간혹 그 정도를 어길 때 독자들은 대번에 이렇게 말한다. "낚였네." 알맹이는 없이 감정에 지나치게 호소하거나 심하게 과장하는 제목을 썼을 때 나오는 반응이다. 그러니 경계하고 항상 조심해야 한다. 혹시라도 글쓴이가 자기감정에 취해 그 정도를 넘었을 때, 글을 검토하는 사람이라도 중심을 잘 잡아줘야 한다.
제목에서 약간의 과장은 주목을 끌고 독자에게 흥미와 재미를 주지만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뭐든지 적당해야 한다. 재미를 위해 약간 과장한 제목을 쓰고 싶다면 일단 내용을 먼저 보자. 소리만 요란한지, (독자가 읽고) 뭐라도 마음에 남길 게 있는지.
내용 있는 과장은 귀엽게 봐줄 수 있지만 소리만 요란한 제목은 신뢰만 떨어뜨릴 뿐이다. 그럴 때는 아무리 재밌는 제목이라 해도 미련을 버리자. 때론 최선보다 차선의 제목이 나을 때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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