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택일 아닌 최적선택 'KH 신경영' 30년…JY '뉴 삼성' 재현해야
①JY 회장 1년…'퍼스트 무버' 되려면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 1년이 지난 2015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사람들이 아버지는 큰 것을 보면서 사업을 하셨는데 난 디테일을 본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버지도 내 나이 때는 크게 보고 사업을 하지는 못하셨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심하게 조직의 아주 작은 것까지 파악한 뒤 시간이 지난 뒤 아버지 못지 않은 업적을 이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건희 선대회장 신경영 신화의 시작은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당시 선대회장 나이는 51세였다. 지금 이재용 회장 나이는 55세. 어느덧 아버지가 신경영을 선언했을 때보다 더 나이가 많아졌다. 세상이 이재용 회장이 그릴 큰 그림의 청사진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오는 27일 회장 취임 1주년을 맞는 이재용 회장은 세계 최고 자리를 지키고 신 성장 동력을 발굴도 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다. 반도체·스마트폰 등 기존 사업은 물론 인공지능(AI)·전기자동차·바이오 같은 4차산업혁명 주력 분야에서도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가 아닌 퍼스트 무버(선도자)가 돼야만 한다고 시장은 삼성에 주문한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3년 이건희 선대회장은 임원들을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 모아 놓고 양보다 질로 승부하는 새로운 경영 원칙을 제시하고 혁신을 부르짖었다. 이 선대회장은 "세상이 전부 질(質)로 가고 우리만 양(良)으로 간다"고 일침을 가했다. 지금도 회자되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이야기가 그때 나왔다. 선대회장의 품질에 대한 집착을 보여준 사건이 1995년 터졌다. 높은 제품 불량률에 대노한 회장이 만들어 놓은 수백억원 어치 휴대전화를 다 태우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른바 휴대폰 화형식이다. 이후 휴대전화 불량률이 11.8%에서 2%로 확 떨어졌다.
사실 30년 전 삼성은 국내 1위 전자업체였다. 그러나 선대회장은 텃밭인 한국이 아니라 세계를 봤다. 독일 키몬다, 일본 엘피다 등 메모리 반도체 업체 간 치킨게임(상대가 포기하도록 정면충돌)을 해 승리하고, 애플과 세기의 특허 소송전도 벌였다. 숱한 위기를 극복하고 삼성을 반도체·TV·스마트폰 세계 1위 기업으로 키웠다.
핵심은 삼성을 양 경영에서 질 경영 조직으로 바꾼 것이다. 국내 1등이 아니라 세계 1등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삼성은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30년간 창조·디자인·마하·글로벌 경영 등 다양한 철학을 적용해 1류 기업이 됐다. 그 과정에서 늘 A와 B 중 하나를 선택하는 전통 경영 방침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최적의 해법을 도출해냈다. 스마트폰 세트(완성품) 사업에서 애플과 경쟁하고 반도체(부품) 사업에서는 납품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서 압도적인 부품 품질을 시장에 검증하면서 애플과도 거래하는 고도의 경영활동을 한 것이 대표 사례다.
이재용 회장은 삼성을 퍼스트 무버로 키워야 하는 중책을 안았다. 선대회장까지는 압도적인 부품·제품 생산 능력을 통해 협상력을 높이는 패스트 팔로어 전략이 통했지만 이젠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2017년 9조원을 들여 전장(자동차 전기·전자장치) 하만을 인수한 뒤 인수합병(M&A)이 끊겼다. M&A나 신사업 진출 등 중요한 의사결정 속도와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계열사를 지휘하는 콘트롤 타워를 만든다는 소식도 들리지 않고 있다. '시스템반도체 2030'(2030년까지 비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등극) 발표 후 4년간 회사 비전 발표도 하지 않고 있다.
M&A(성장동력 강화), 콘트롤 타워 부활(의사결정 속도 제고), 비전 발표(불확실성 해소)를 할 것인지, 한다면 무엇이 우선인지 등을 결정하지 않으면 시장은 이재용 뉴 삼성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된다. 그나마 작년 8월 이 회장 사면·복권 후 2026년까지 8만 명 채용·450조원 투자, 2042년까지 300조원 반도체 공장 5곳 설립 등을 발표한 것은 긍정적이라는 평가다. 이제는 투자·고용 계획을 넘어 'KH 신경영'처럼 'JY 뉴 삼성 경영' 총괄 전략을 구체화해 시장에 알릴 시점이라는 지적이다.
전사 경영 비전을 발표하기 어렵다면 특정 사업을 5~10년간 집중 육성한다는 '신수종 플랜'을 발표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미 삼성은 이차전지에서 LG에너지솔루션에, AI에서 네이버와 LG 등에 시장 점유율과 사업 포트폴리오에서 밀리고 있다. 2010년 태양전지·자동차용 전지·LED·바이오·의료기기 등 5개 사업을 콕 집어 삼성 신수종이라고 발표한 이 선대회장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실패도 있었지만 바이오(삼성바이오로직스)·이차전지(삼성SDI) 등은 이제 삼성의 핵심 사업으로 자리잡았다는 평가다.
김경준 CEO스코어 대표는 "현대차기아가 내연기관차만으로 10년 뒤 위상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해 전기자동차 사업에 속도를 내듯 삼성전자도 D램 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을 키워야 한다"며 "D램으로 번 돈을 신수종에 투입해 10~20년 뒤를 도모할 수 있도록 조속히 전사 차원 경영 비전을 발표할 때"라고 했다.
문채석 기자 chaes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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