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새벽을 연 '민중의 해방자' 원효
[김삼웅 기자]
바르게 산 이들의 삶과 유산. 역사에 대해 여러가지 해석이 나오지만,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인물사라는 점이다. 역사는 인물에 의해 진행되고 발전 또는 퇴보한다. 시대마다 중심 인물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 방향과 속도 그리고 결과가 결정된다.
역사의 장(場)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여 유명인으로 혹은 무명인으로 살다가 사라진다. 소수의 유명인은 기록으로 남고 다수의 무명인들은 종적없이 증발된다. 과거에도 그랬고 민주주의 시대라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역사의 '일반원칙'에도 불구하고 예외는 있게 마련이다. 비록 당대에는 권부인이나 유명인이 아니더라도 생각과 판단이 바르고 올곧게 살았다면 따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기억(기록)으로 연결된다. '위대한 아웃사이더' 이야기도 수없이 많다. 여기서는 인물의 생애보다 남긴 글 한 편으로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개중에는 권력자도 있고 유명인도 있을 것이다)
▲ 효창원 원효대사 동상 |
ⓒ 김종훈 |
전란과 굶주림에 빠져 있는 대중과 함께하면서 종파도, 어떤 굴레도 벗어던지고 오직 해방자이고 자유인이었던 1300여 년 전의 인물. 한국인 치고 원효(元曉, 617~686) 대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불교신자가 아니어도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고 신분은 육두품이었다. 후손이 나중에 성을 설(薛)씨로 썼는데 속성이 설씨였던 것 같다.
불교의 공인을 주장하던 이차돈이 처형당하고(527년). 신라에서 불교는 여전히 금지되다가 진흥왕이 즉위하면서 믿음과 출가가 허용되었다. 그가 출생한 이듬해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신라의 승려 원측과 자장이 당나라에 유학하는 등 두 나라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원효의 어릴적 이름은 새털(銴童), 20대 초에 출가하면서 원효 즉 '신새벽'이라 지었다. 이름에 담긴 뜻이 예사롭지 않다. 환속한 이후에는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자처하였다. 엄격한 골품제의 신분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원효는 진골은 아니어도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젊어서 출가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원효가 33살 무렵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신라 귀족가문 자제들이 했던 일이다.
원효는 청년 시절에 의상(義相)과 함께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러 고구려 땅을 지나 요동에 이르렀을 때, 어느날 해는 저물어 가는데 인가가 없어 잘 곳이 마땅치 않았다. 잠을 청할 만한 곳을 찾아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밤이 되어서 겨우 한 곳을 찾아 잠을 청했다. 그는 자다가 목이 말라 물을 찾았는데 곁에 어떤 사발 같은 것에 물이 들어 있자 그 물을 마시고는 다시 계속해서 잠을 잤다. 새벽이 되어 날이 밝자, 밤에 잠을 잤던 곳을 보니 오래된 무덤이었다.
그리고 지난밤에 목이 말라 먹었던 것은 사발이 아니고 사람의 해골이었으며, 먹은 물은 그 해골에 고인 빗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원효는 그것을 보고는 크게 놀라서 곧 토하여 버렸다.
좀 시간이 흐른 후 원효는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다. 즉 해골의 물인 줄 모르고 먹었을 때에는 몸과 맘이 그처럼 편하다가, 날이 밝아서 해골의 물인 줄 알게 되니까 맘이 불안하여 물을 토한 것은, 결국 모든 일이 마음에 있다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유심론(唯心論)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마침 그때 고구려 관원들이 원효 일행에게 정탐하려는 자들이라 하여 신라를 쫓아 보내는 바람에 원효는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이를 계기로 크게 깨달은 바 있어 정진한 끝에 위대한 학자가 되었다. 원효는 스스로 원효종(元曉宗, 곧 원효대사의 선종(禪宗))이라는 불교종파를 세우고, 이를 크게 전도하여 신라 불교가 융성한 시대를 맞이하게 만들었다.
원효의 불교가 신봉하는 종지(宗旨)는 "세상 사람을 도와주고 나라를 사랑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를 수행의 큰 방법으로 여겼다. 이러한 종지는 신라·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승려들에게 전수되어, 사대주의를 취하지 않으면서 애국봉공하는 미풍을 전해지도록 했다. (장도빈, <한국의 혼>, 경학사)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온 원효는 깨달은 바 많았다.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알게 되고, 조정에서는 공인된 불교도 일반 백성은 신봉치 못하도록 막았다. 고구려·백제와의 전쟁으로 많은 병사들이 희생되고, 백성들의 생활은 갈수록 피팍해갔다.
원효는 절집에 앉아 염불하는 대신 저잣거리를 누비면서 세상의 화평과 복락을 빌었다. 그리고 승려와 관리들에게 불문을 활짝 열어 백성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백정·술장수 등과 어울리고 우연히 광대에게서 얻은 표주박을 '무애(無碍-걸림돌이 없음)'라 이름 짓고 저자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따르는 사람이 많았고 더러는 미치갱이 똘중이라고 돌맹이를 던졌다. 궤념치 않았다.
하루는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준다면, 내가 하늘을 떠받들 기둥을 베어오련만"이란 노래를 지어 불렀다. 사람들은 어리둥절,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태종무열왕이 소식을 전해듣고 원효를 요석궁 공주와 합방시켰다. 요석공주는 남편과 사별한 젊은 과부였다. 얼마 후 아들 설총이 태어나고 원효는 환속하여 불교대중화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아들은 과연 '하늘을 떠받는' 기둥이 되었다.
명색이 출가자의 신분으로 아무리 과부라고는 하지만 일국의 공주와 합방하고 아들을 낳았다는 스토리는 너무나 파격적이었다.(이 내용은 일연의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에 나온다) 그는 중생제도에 나섰다. 귀족 중심의 불교가 아닌 일반 대중을 위한 불교였다.
좋은 음식으로 길러도 이 몸은 무너질 것이요, 부드러운 옷으로 보호해도 목숨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수행인 없는 빈 몸은 길러도 이익이 없고, 덧없는 목숨은 아껴봐도 보전하지 못 한다…. 백 년이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라고 닦지 않고 방종하랴.…
사대(四大)는 흩어지니 내일 살아있으리라 기약할 수 없고, 오늘도 이미 저물었으니, 아침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원효 <발심수행장>)
원효대사는 686년 3월 30일 속령 70살로 산골의 토굴에서 입적할 때까지 80여 부 150여 권에 달하는 저술을 남겼다. <대승기신론(大乘記信論)> 등 유저는 하나 같이 불교의 명저로 평가받는다.
"한 사람의 중생이라도 버림 없이 고해(苦海)에서 구제하자"는 것으로 요약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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