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현 목사의 복음과 삶] 국화 향기에 젖어
가을의 멋스러움에 가슴이 단풍처럼 익는 계절이다. 가을은 나이 든 노신사처럼 몸에 밴 멋이 있다. 가을꽃은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편이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주는 색채감은 깊다. 가을꽃 중 국화는 여름 더위에 시달렸던 이들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힘이 있다. 국화 향은 장미나 백합처럼 강하지 않지만 묵향 같은 그윽함이 스며 나온다. 그래서인지 후각보다는 오감을 자극하는 꽃이 국화다. 국화는 가을바람에 시달린 탓인지 꽃잎의 매무새가 야무지다. 짙은 컬러 꽃잎에서 철학가의 무게가 느껴진다. 화들짝 피어난 꽃이 아니라 긴 시간 속에 농익어 피어난 꽃답다.
가을은 지성을 자극한다. 책을 손에 들지 않으면 왠지 죄스러워지는 계절이다. 가을꽃 향기는 생각의 불꽃을 발화시킨다. 삶의 깊이는 생각의 깊이다. 메마른 도시 삶에 쫓기다 보면 얕은 생각에 자기 자신도 질려 버린다. 분주한 삶에 토막 난 생각들은 무념에 가깝다. 생각의 바다는 언제나 출렁거려야 한다. 생각 속에 치열함이 없으면 이미 지친 삶이다.
생각의 무기력은 삶에 그대로 나타난다. ‘열심히 일하라’(Work Hard)보다 ‘열심히 생각하라’(Think Hard)이다. 삶의 업그레이드는 생각의 업그레이드이다. 생각에 날개를 달면 그것이 꿈이다. 독서가 좋은 것은 무덤덤한 내 생각에 누군가 돌을 던져 정신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한 번씩 생각을 휘저어 요동치게 해야 한다. 지루해진 나를 낯설게 해야 한다.
한 해의 진짜 준비는 가을에 한다. 미래를 향해 달려갈 정신적 힘을 얻으려면 가을이 베푸는 은총을 누려야 한다. 국화 향의 그윽함에 취해 생각의 세계에 불을 지펴볼 만한 계절이다. 봄부터 그토록 한 송이 국화꽃을 피워야 했던 이유가 분명해진다. 국화 향은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성찰을 일으키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생각의 근력을 키우고 냉동된 생각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생각의 꼬리를 물고 물어 사유의 강을 깊게 하면 영혼에 근력이 생긴다. 살다 보면 삶은 무미건조해지고 가슴은 돌덩어리처럼 굳어진다. 감동은 줄고 일상에 치여 무신경한 활동만 반복된다.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줄고 냉기만 흐른다. 즐겁게 해줄 게임은 개발되는데 우울증은 늘어난다.
가을이다. 가을은 차분하지만 썰렁한 계절은 아니다. 철학적이며 예술적이다. 감성이 깨어나는 시기이고 영적으로 민감해진다. 들판의 억새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 홍조를 띠고 매달린 나뭇잎들은 시를 읊고 싶어지게 한다. 오래된 시집을 뒤적거리고 커피 향에 예민해지고 낯선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그림에 눈길이 가는 것은 감성이 춤을 추는 시절이기 때문이다.
가을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싶은 애절함을 만든다. 삶의 흐트러진 것들을 복원하는 계절이다. 과거의 아픈 상처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재생하는 힘이 가을에 있다. 열심히 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영혼 없는 삶, 따뜻한 가슴 없는 전문인, 생각이 사라진 무심한 행위는 모두를 불쌍한 노동자로 전락시킨다.
가을을 가을답게 보내지 않으면 허무가 깊어지고 우울의 덫에 빠질 수 있다. 삶을 하나의 시로 복원해야 한다. 움츠려 있던 감성과 숨겨진 잠재력이 살아나야 한다. 감성이 살면 창의력은 날개를 단다. 가슴이 설레고 심장이 뛰면 무기력증에서 깨어난다. 생각이 깊어지면 삶의 색채는 깊어지고 일상은 파노라마로 탈바꿈한다. 가을은 변화를 꿈꾸는 계절이다. 늘 그날이 그날이 아니다. 가을 산에 불이 붙듯 삶 전체가 곱게 물들어 가야 한다.
가을에는 조금 외로워져도 괜찮다. 일시적 침묵 양식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생각의 나무를 키워야 한다. 국화보다 더 짙은 향이 스며 나올 때까지 시간을 익혀야 한다. 가볍고 천박한 삶을 만들지 않으려면 무심코 지나쳐 버렸던 사소한 일상마저 묵상 소재가 돼야 한다. 평범함이 비범함으로 바뀌는 것을 보는 순간 잠자던 영혼은 깨어난다. 무료하고 생기 없던 기도의 자리가 환희에 찬 하나님과 입맞춤 자리로 바뀔 수 있다면 가을은 축복이다.
(부산 수영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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