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의 시가 그림이 됐다, 독일 거장 안젤름 키퍼 개인전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놓으시고/ 들판에 바람을 풀어주소서/···/이제 집이 없는 사람은 다시는 집을 짓지 않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을날’)
미술관에 간 관람객이 느닷없이 오스트리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의 시(詩)를 마주하게 된다. 릴케의 시는 관람객을 그의 그림 안으로 더욱 깊이 끌어들인다. 전시 중인 작품이 모두 릴케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화가는 대형 캔버스 안에 ‘가을날’에 나오는 구절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라는 문장을 작품에 직접 써넣었다. 독일 현대미술 거장 안젤름 키퍼(78)의 개인전 ‘가을(Herbst)’ 얘기다.
전시는 대전시 인동에 새로 문을 연 미술관 헤레디움에서 지난달 8일 개막, 내년 1월 31일까지 계속된다. 이번 전시에서 키퍼는 총 17점을 선보인다. 2층 규모의 전시장에서 열리는 전시는 특유의 무게와 깊이로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무엇보다 시선을 끄는 것은 가을의 대지로 가득 채운 듯한 대형 캔버스 안 풍경이다. 키퍼는 자신이 느끼는 가을의 심상을 흙과 벽돌, 납으로 만든 나뭇잎 등 다양한 오브제를 활용해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언뜻 보면 캔버스에 담긴 것은 폐허의 대지 그 자체다. 벌거벗은 들판, 땅으로 떨어지고 있는 낙엽들, 마른 나뭇가지가 표면을 덮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함선재 헤레디움 관장은 “키퍼의 폐허는 끝을 의미하지 않고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며 “키퍼는 가을을 통해 생명의 순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고 말했다.
화면 속 풍경은 처음엔 어두워 보이지만, 그 안의 빈 나뭇가지와 짙은 갈색과 주황색 낙엽들은 ‘빛’의 파편으로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키퍼는 한국 전시를 앞두고 촬영한 인터뷰 영상에서 “여기 작품들은 볕이 좋았던 어느 가을날 런던 하이드 공원의 풍경에서 시작됐다. 가을 낙엽을 비추는 빛과 폭발적인 색감에 압도돼 그 풍경을 사진으로 찍고 작업에 착수했다”고 말했다.
키퍼는 독일인이지만 30년 넘게 파리에 살고 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으로부터 조르주 브라크(1882~1963) 이후 최초로 영구 설치 작품을 의뢰받았을 정도로 현대 미술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문학과 신화, 연금술 등을 작업에 끌어들이고, 캔버스에 모래와 지푸라기, 진흙과 금속, 식물 등을 과감하게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지난해 제59회 베니스 비엔날레 당시 두칼레 궁전에서 열린 그의 특별전은 최고의 화제작으로 거론됐다. 쇠락과 재탄생이라는 인간의 역사를 장엄하면서도 강렬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다.
전시장인 헤레디움은 1922년에 지어진 구(舊)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복원한 건물이다. 100년 된 콘크리트 천장과 창문, 그리고 타일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2004년 문화재로 등록된 이 건물은 해방 이후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뀐 끝에 2020년 대전시의 도시가스 공급업체 씨엔씨티에너지(황인규 회장)가 인수했다. 이어 씨엔씨티마음에너지재단이 복원 작업을 지난해 마무리하고 지난달 복합문화공간으로 정식 개관했다.
대전=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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