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일군 기업 소망으로 뿌리내린다
지난 4월 고은섬유 대표 송금순(70·영광교회) 권사는 ‘권사 은퇴식’에 맞춰 자서전 ‘약한 나로 강하게’를 출판했다. 2021년 남편 김영태 장로가 세상을 떠난 후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남겨야겠다는 마음을 책에 담았다. 지난 5일 영광교회에서 만난 송 권사는 “살면서 ‘예수에 미쳐있다’는 말을 줄곧 들었는데, 그 이유는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이 항상 동행해주셨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가정, 그리고 사업장에 부어주신 은혜를 혼자 간직하고 있다가 내가 떠나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글쓰기가 어렵고 서툴렀음에도 용기를 냈다”고 고백했다.
송 권사가 가장 좋아하는 찬양은 자서전 제목이기도 한 ‘약한 나로 강하게’이다. 가사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가 꼭 본인 이야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송 권사는 가난한 시골 가정에서 태어나 친구들이 중학교에 진학할 때 방직 회사로 출근하며 ‘꼬마 기술자’가 됐다. 19세에 상경해 섬유 제조 업계에서 바쁘게 일했지만 월급은 모두 형편이 어려운 시골집으로 보내야 했다. 23세에는 결핵에 걸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상태에서도 결핵약을 복용하며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송 권사는 ‘배운 것이 없으면 돈이라도 있든가. 돈이 없으면 건강하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나에게는 기댈 만한 것도 기대할 것도 없구나…’라며 좌절했다. 그때 기숙사 식당 아주머니가 볼 때마다 예수를 전했다.
“교회는 절대 안간다”고 인상을 구기며 대답하곤 했지만, 어느 비 내리는 날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을 때 “교회 말고 구역예배라도 같이 가자”는 아주머니 말에 구역예배에 참석하게 됐다. 그날 이후 송 권사는 주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기독교인이 됐다.
25세에 같은 회사에서 일하던 기술자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전쟁고아로 여동생과 함께 영아원에서 자라 일찍 기술을 익혔지만 여동생을 돕느라 수중에 돈이 전혀 없었다. 300만원의 빚을 안고 결혼했고, 두 딸과 함께 빠듯한 살림에도 교회 신앙생활에 열심을 다 했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와 시장 곳곳을 돌며 전도하며 ‘내 처지가 이런데 전도하는 게 맞나’는 생각도 했지만 ‘하나님께 내 전부를 드려도 아깝지 않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얼마 후 남편이 실직하면서 부부는 호두빵 장사를 시작했다. 아침마다 손수레를 끌고 시장 구석으로 나가, 손에 익숙하지 않은 호두빵을 구울 때면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던 중 지인에게 실 관련 사업 아이템을 소개받고, 매일 저녁 집으로 돌아와 “하나님,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어느 날 저녁 기도 자리에서 송 권사는 “사업을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수중에는 방 보증금 80만 원이 전부였고,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300만 원이 필요했다. 다음날 새벽기도를 마친 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웃 동네에서 분식집을 하는 친언니가 떠올라 자전거 방향을 돌려 언니네로 향했다. 언니의 형편상 돈을 빌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지만, 송 권사의 이야기를 들은 언니는 “지금 딱 200만원이 있는데 네가 사용하면 좋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1986년 11월 6일 서울 자양동 지하공간 한켠에 중고 기계를 한 대 두고 고은섬유를 시작했다.
그런데 사업 시작 3개월 만에 위기가 찾아왔다. 3개월 만에 일감이 완전히 끊긴 것은 물론 보증금도 모두 날릴 위기 앞에서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모두가 그만 사업을 정리하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시작하라고 하셨으니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작정 기도를 시작했다. 한 달 후 바로 옆 공장 사장의 일감 제안으로 위기가 해결된 것은 물론, 후에 옆 공장을 인수하게 된 계기가 됐다.
자동차 업체에 원단을 납품하는 고은섬유는 IMF와 공장 이전 등 몇 차례 위기를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극복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현재 고은섬유는 경기도 용인시에 2800㎡ 규모로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버스 크기의 원단 제조 기계 35대가 24시간 가동되고 있다. 또한 자동화시스템을 갖추고 15명의 직원이 근무하며, 직원 대부분은 25~30년을 함께한 가족 같은 사이이다.
송 권사는 “남편은 섬유 계통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기술이 뛰어났지만 우리는 사업 체질이 아니었고, 영업에는 더욱 자신이 없었다. 거래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인맥이 필수였지만 인맥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라는 ‘신맥’이 있었다. 거래처에서 우리를 찾아왔고, 우리는 약속대로 잘 만들어 주기만 하면 됐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사업 체질이 아니었지만 크게 사업이 힘들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고은섬유는 2000년대 초반부터 매월 수입의 10%를 십일조하고 있다. 당시 수익의 10%를 십일조 해도 운영이 빠듯했기에 모두가 “회사가 망할 것이다”며 염려했지만, 결과적으로 회사가 망하지 않은 것은 물론 그전에 사용하던 카드 현금서비스도 일절 받지 않게 됐다. 송 권사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가면 망하지 않는다”며 “내 삶의 최고의 가치는 회사, 돈, 명예보다 믿음”이라고 밝혔다.
송 권사의 집은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있고, 교회는 서울 자양동에 있다. 30년 이상을 매일 한결같이 교회 새벽예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송 권사는 “마음이 늘 교회에 있어서 교회가 멀다고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송 권사는 수요일 새벽예배 후 오전에는 전도팀 모임 및 전도 활동을 하고, 오후에는 1:1 성경 공부를 한 후 저녁에는 ‘수요저녁예배’에 참석해 자정까지 기도한다. 이후 교회에서 잠시 잠을 잔 후 새벽 3시30분에 일어나 목요일 새벽예배를 준비하고, 새벽예배가 끝나면 회사로 출근한다. 자타공인 ‘평신도사역자’로 빈틈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송 권사는 “하나님께 무엇으로 보답할지 고민했을 때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며 “교회 안 다음세대를 위해 기도할 때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다음세대를 위해 힘을 보탤 계획이다”고 비전을 전했다.
박성희 객원기자 jonggy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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