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다 바꾸자" 그후 30년…다시 신경영에 길을 묻다
" “우리가 언제까지 변해야 할 거냐. 영원히 변해야 한다. 안 변하면 일류로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 "
지난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며 일대 혁신을 주문했던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의 ‘신경영 선언’ 30주년을 맞아 세계 석학들이 이 선대회장의 리더십과 경영철학을 집중 재조명했다.
추모 3주기, 이재용 취임 1년 겹친 ‘신경영’
18일 한국경영학회는 삼성글로벌리서치의 후원으로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이건희 선대회장은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호텔에서 수백명의 임원을 모아놓고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라 불리는 신경영 선언을 발표했고, 이후 삼성은 반도체와 스마트폰 시장을 선도하는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
올해는 이 선대회장의 3주기(10월 25일)와 신경영 선언 30주년이 되는 해로, 삼성은 학술회와 음악회(19일) 등 공식행사를 진행하며 추모 분위기를 조성할 계획이다. 특히 오는 27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취임 1주년까지 맞물리며 선대회장의 신경영 철학을 미래 삼성이 나아갈 비전의 밑거름으로 삼겠다는 방침이다.
이날 학술회에는 김재구 한국경영학회장, 김황식 호암재단 이사장을 비롯해 국내외 석학과 삼성 관계사 임직원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석학들은 30년 전 한국의 한 기업에 불과했던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이건희 선대회장의 독특한 리더십과 경영방식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과거 데이터 없이 미래 상상한 르네상스인”
로저 마틴 캐나다 토론토대 명예교수는 “40년 넘게 수많은 경영자에게 컨설팅을 해왔는데 이건희 회장 같은 리더는 드물었다”며 “그는 상상력과 통찰력을 가진 ‘통합적 사상가’였다”고 평가했다. 통합적 사상가의 특징은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각각 우수한 요소를 포함한 새로운 형태로 창의적인 해결책을 만든다는 점이다.
마틴 교수는 “통상 리더들은 과거의 데이터를 근거로 미래 의사결정을 내리는데, 이 선대회장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과거 데이터도 없는 상황에서 가능성과 상상을 바탕으로 전략적 미래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김상근 연세대 신학대 교수도 이 선대회장을 “단순히 국가 경제에 기여하고 일자리를 제공하는 기업가나 대기업 리더가 아닌 자선가로서의 면모를 가진 ‘르네상스인’”이라고 표현했다. 과거 피렌체의 메디치가(家)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이끌었듯 문화·예술·과학·의료·복지·체육 등 사회 전반의 분야에 공헌하며 경영 외에도 한국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의미다.
“직원들, 삼성에 얼마나 몰입하고 있나”
석학들은 ‘이건희 신경영’의 본질은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혁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리타 맥그래스 컬럼비아대 경영대 교수는 “30년 전 신경영은 ▶영원한 위기정신 ▶운명을 건 투자 ▶신속하고 두려움 없는 실험 등 현재의 성공 전략과 완전히 일치하는 방식으로 수립됐다”고 말했다. 스콧 스턴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영대 교수 역시 “오늘날 경제·지정학적 불확실성의 시대에 이 선대회장의 ‘가능성을 넘어선 창조’는 삼성과 한국이 미래로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고 강조했다.
이날 특히 재계와 학계의 관심을 끈 것은 ‘삼성이 앞으로도 일류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느냐’하는 주제였다. 신경영 선언의 혁신 DNA를 업그레이드해 미래 비전에 활용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틴 교수는 ‘삼성 직원들의 몰입도’ 문제를 꼬집었다. 그는 갤럽 통계를 예로 들며 “오늘날 대기업 직원의 17%는 회사의 목표를 회피하고 51%는 관심이 없으며, 32%만 조직에 몰입하고 있다”며 “회사는 큰데 직원은 자신이 부품처럼 작게 느끼지 않도록 사회·타인·스스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별도의 인터뷰에서 “큰 기업은 돈과 자원이 많아 뭐든 할 수 있겠지만, 삼성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할 수 있다고 해서 아마존이나 알파벳(구글 모기업)처럼 너무 많은 분야에 진출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제2의 신경영’ 이루는 핵심요소는?
이 선대회장이 평생 그랬듯 위기의식을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맥그래스 교수는 “세상에 지속가능한 경쟁우위란 없다는 것, 변화가 이상한 게 아니라 안정이 이상한 것이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다른 기업보다 성공 가능성을 높이려면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로 정보가 투명하게 제공되게 하는 등 보고의 굴레에서 탈피해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며 ‘속도’를 강조했다.
글로벌 경영의 기조로 자리 잡은 ‘윤리경영’은 삼성에도 필수적인 요소다. 김태완 카네기맬런대 교수는 “신경영 발표 당시 디자인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는 ‘디자인 경영’이 화제를 일으켰지만 곧 ‘AI 윤리’의 혁명이 찾아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세계 각국의 기업들이 인공지능 윤리 전문가를 키우기 위해 경쟁하는 만큼 삼성도 윤리 전담팀을 만들어 준비해야 지속가능 경영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는 “미래 세대에게 매력적인 ‘제2의 신경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삼성의 신경영은 신세대의 강점과 통하는 요소가 많다”며 ▶디지털 세대를 포용할 수 있는 ‘디지털 경영’ ▶투명성을 중요시하는 신세대 취향을 저격한 ‘개성 경영’ ▶글로벌에 익숙한 신세대의 협력성을 장착한 ‘콜라보(협력·협업) 경영’ ▶인권세대인 신세대 가치관을 이식한 ‘인권 경영’ 등을 제시했다.
한편 이날 행사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3주기 추모 공연을 했다. 이 선대회장은 취임 초기부터 예술 인재를 선발해 해외 연수를 지원하고 백건우·백남준·이우환 등의 활동을 후원했다. 지난 2020년 이 선대회장 별세 당시 백건우는 “아버님을 잃은 것 같다”며 눈물을 흘렸고,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이건희 회장님은 타이탄, 거장이시다. 이 나라에 자신감을 주셨다. 해외 어디를 나가도 내가 한국인이라는 자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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