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소 골목에 알루미늄 통을 들고 나타난 이들의 정체

구은회 2023. 10. 1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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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환경건강센터 '소규모 사업장 안전보건 관리사업,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가야하나' 포럼 열어

[구은회 기자]

 18일 오후 일환경건강센터 주최로 열린 '소규모 사업장 안전보건 관리사업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가야하나' 포럼에서 발표자들이 발언하고 있다.
ⓒ 일환경건강센터
 
# 어느 날 인쇄소 골목에 수상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작업장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캐묻는가 하면, 각종 화학물질의 보관상태 등을 살피고 다닌다. 이건 이래서 안 된다, 저건 저래서 위험하다며 잔소리까지 늘어놓는다. 그리고는 며칠 뒤, 그들은 뚜껑 달린 은색의 둥근 알루미늄 통을 들고 다시 찾아왔다. 흡사 쓰레기통 같이 생긴 저것은 어디에 쓰는 물건일까?

서울 을지로와 충북 청주 소재 인쇄소 골목에서 진행되고 있는 '작은 인쇄소 소분용기·걸레함 보급사업'은 소규모 사업장 사업주와 노동자를 위한 직업병 예방사업의 일환이다.

인쇄업은 대표적인 도심 속 영세 제조업이다. 고용노동부의 사업체노동실태현황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전국의 '인쇄 및 기록매체 복제업' 사업체는 9498곳, 종사자수는 5만6064명이다. 5인 미만 사업장 비율이 66.2%로 가장 높고, 5인 이상~9인 이하 사업장 비율이 21.2%로 뒤를 잇는다. 전체 사업장 10곳 중 8곳 이상이 소규모 사업장이다.

영세성은 위험을 동반한다. 초단기 납품 관행에서 비롯된 빈번한 철야작업과 주야 맞교대 근무형태, 시너·톨루엔·크실렌 같은 유해 화학물질의 사용, 작업장 내 소음 등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소가 즐비하다. 하지만 대대적인 작업환경 개선을 추진하기도 쉽지 않다. 사업주가 자비를 들여 국소배기장치 같은 안전보건설비 시공에 나서리라 기대하기도 어렵지만, 설사 그런 의지가 있더라도 낙후된 건물 밀집구역에 세 들어 사는 처지라서 설비 시공을 가로막는 현실적 제약이 크다.

이는 공공기관인 서울근로자건강센터와 민간기관인 일환경건강센터가 서울와 청주지역 일대에서 '작은 인쇄소 소분용기·걸레함 보급사업'을 추진하게 된 배경이 됐다. 작은 인쇄소들을 상대로 종합적인 환기대책을 제시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들 단체는 인쇄소 내 유해 화학물질의 보관과 처리에 주목했다.
 
 소규모 인쇄소 내 각종 안료와 유해 화학물질의 안전한 사용을 위해 소분용기(사진 오른쪽 위)와 폐걸레 수거함(사진 오른쪽 아래)을 제공했다.
ⓒ 일환경건강센터
 
빈 깡통이나 음료수병에 대충 담아 사용하던 화학물질을 필요한 만큼 나눠 쓸 수 있도록 소분용기를 배포하고, 해당 화학물질의 독성과 건강영향을 표기한 스티커를 배부했다. 또 인쇄설비에 묻은 각종 화학물질을 닦아내는 폐걸레가 방치돼 사업장 환경을 오염시키는 문제를 줄여보고자 뚜껑이 달린 폐걸레 수거함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작업장 위험성 평가(Risk Assessment)를 바탕으로 실행가능하고 효과적인 해법을 모색한 사례다.

작은 사업장 안전보건관리 'ABCD 전략'이 필요하다

일환경건강센터(이사장 류현철)가 주최한 '소규모 사업장 안전보건 관리사업,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가야하나' 포럼이 18일 오후 서울 양재동 재단법인 숲과나무 강당에서 진행됐다. 소규모 사업장 안전보건 관리사업 시행 경험이 있는 공공·민간부문 기관들의 성공사례를 공유하고 성과와 한계, 제도 개선 방향을 모색하고자 마련된 자리다.

고용노동부의 2021년 산업재해 현황분석에 따르면 국내 사업장 중 50인 미만 사업장 비율은 98.3%, 전체 종사자 중 50인 미만 사업장 소속 노동자 비율은 59.8%다. 특히 50인 미만 사업장에 속한 재해자 비율이 72.7%에 달한다. 
 
 최영철 서울근로자건강센터 부센터장
ⓒ 일환경건강센터
 
최영철 서울근로자건강센터 부센터장은 "산업재해율은 종사자 규모에 반비례하는 특성을 보인다"며 소규모 사업장의 특성에 주목했다. 소규모 사업장의 경우 ▲업종·지역·고용관계·노동조건·작업환경의 차이가 크고 ▲안전보건에 투여할 자원이 없고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동시에 자체적인 안전보건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안전보건 규제와 지원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높고 ▲법적 준수사항을 요식행위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 최 부센터장의 설명이다.

전문성을 갖춘 공공과 민간의 안전보건 기관들이 소규모 사업장 안전보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이유다. 서울근로자건강센터와 일환경건강센터의 '작은 인쇄소 소분용기·걸레함 보급사업' 역시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추진됐다.

이런 맥락에서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 증진을 위해 이른바 'ABCD' 전략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공공과 민간부문의 제휴(Association)와 협력(Best Collaboration)을 통한 발전(Development) 전략이다. 안전보건 관련 기관들이 협업 시스템을 구성해 소규모 사업장의 안전보건 문제에 공동으로 대응할 경우, 유의미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김은경 근로복지공단 안산병원 건강관리센터장
ⓒ 일환경건강센터
 
김은경 근로복지공단 안산병원 경기남부근로자건강센터 센터장은 ABCD 전략을 제안하며 "공공과 민간기관들이 전문성과 인력·비용 등 가용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소규모 사업장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면서 협업을 통한 시너지 효과를 강조했다. 일회성 서비스가 아닌 작업환경개선이나 건강진단 사후관리까지 이어지는 관리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위험성 평가 실효성 제고의 전제조건 '노동자 참여'

이날 포럼에서는 국제노동기구(ILO)가 개발한 소규모 사업장 작업환경 개선 프로그램인 '와이즈'(WISE, Work Improvement for Small Enterprises)를 적용한 울산 북구의 작업환경 개선 지원사례 발표도 진행됐다.

와이즈는 근로감독관이 소규모 사업장들을 일일이 점검할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한 프로그램이다. 정부의 관리감독보다는 노동자와 사업주의 '참여'를 강조하고, 공공·민간 안전보건 기관들의 적극적 개입을 요구한다. 전문가들이 소규모 사업장 안전보건의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특히 사업장 안전보건 문제에 대해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해법을 찾도록 지원하는 소통 전문가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의 역할이 중요하다.
 
 박기옥 울산북구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부센터장
ⓒ 일환경건강센터
 
2014년부터 울산지역 취약노동자 건강증진사업을 진행하며 소규모 사업장에 와이즈 프로그램을 보급해온 박기옥 울산북구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부센터장은 "노사가 직접 참여해 작업환경을 개선해 나가면서 안전보건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며 "그 결과 근무 만족도가 높아지고 이직률이 낮아지는 등 고용유지 효과까지 나타났다"고 평가했다.
한편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위험성 평가가 소규모 사업장에서도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참여 보장과 정부 지원 확대가 중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류현철 일환경건강센터 이사장
ⓒ 일환경건강센터
 
류현철 일환경건강센터 이사장은 "위험성 평가에 노동자들을 참여시켜 위험을 제대로 기록하고, 그 위험에 대한 개선계획을 세우고, 안전조치를 등한시해 발생한 결과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위험성 평가의 효과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작은 사업장 위험관리와 노동자 건강관리를 위한 국가·정부·지자체 차원의 시스템 마련이 필요하고, 이러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총괄하는 안전보건행정조직의 건립을 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익법인 일환경건강센터는
 
 일환경건강센터
ⓒ 일환경건강센터
 
충북 청주시에 위치한 공익법인 일환경건강센터는 2019년 민간 지원으로 설립된 국내 최초 민간부문 노동자 건강센터다.

일터 내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건강증진사업을 진행 중이다. 원하는 사람은 무료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센터에서 제공되는 서비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cweh-koreashe.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의 전화는 043-904-741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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