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을 떠나지 못한 여든 넷의 투사... 아이들의 탄식
'대안'이라는 표현 하에 경쟁과 입시몰입교육을 지양하고, 자치와 상생을 위한 교육을 하며, 학생들이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곳에서 여러 존재들과 좌충우돌하며 교육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전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안사을 기자]
나는 지금 대관령의 초입 어흘리 마을의 숲속에 있다. 40명의 학생을 거느리고서 말이다. 그들은 각각 60리터와 80리터 배낭에 텐트, 침낭 등을 꾸역꾸역 집어넣고, 정선을 시작으로 하여 태백을 거쳐 강릉으로 옮겨왔다. 5일째 밤(17일 기준)이다. 지칠 만도 한데 아이들은 현재 뚝딱 저녁을 지어 먹고 재잘거리느라 바쁘다.
▲ 출발 13일 아침 7시 40분. 배낭에 갖가지 짐을 싸서 버스에 몸을 싣고 있다. |
ⓒ 안사을 |
▲ 첫 배낭여행 버스에서 내린 학생들이 졸드루 야영장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
ⓒ 안사을 |
아이들은 2박 3일 동안 정선군 북평면 나전리에 있는 졸드루 야영장에 머물렀다. '졸'은 좁다는 뜻이고 '드루'는 들이란 뜻인데 정선의 뾰족한 봉우리들과 좁은 골짜기가 만들어 낸 애환 어린 삶이고 아름다운 우리말이다. 오대천을 왼쪽에 끼고 정선으로 내려오다 보면 항상 보이던 곳이라 언젠가 묵고 싶은 곳이었는데 아이들과 함께 오다니 마음이 뿌듯했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호화로운 캠프장이 아니다. 마을회에서 비영리사업으로 유지하고 있는 작은 야영장이다. 편의시설의 수준은 샤워장이 딸린 국립공원 야영장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이런 불편한 처소를 선호하는 이유는 가격이 저렴할뿐더러 부족함 속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면 저절로 생기는 배움과 행복 때문이다.
▲ 조금씩 적응하는 아이들 몇 번을 무너뜨리면서도 그늘막과 텐트를 완성하고 밥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다. |
ⓒ 안사을 |
기행 3일차에 만난 이옥수 작가와 이원갑 선생님
이전 연재에서도 밝혔듯, 본 기행은 단편적인 과정으로 기획되지 않았다. 한국사, 뮤지컬과 더불어 다양한 과목이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주제통합 수업으로 연결되어 있다. 올해는 정선을 비롯한 강원도의 자연을 탐방하면서 과거 이곳에 있었던 사북사건(사북 항쟁으로 부르고자 한다)을 배우고 그와 함께 먹는 것과 자는 것을 스스로 해결하는 활동을 겸하고 있다.
졸드루에서 3일째 되는 날, 우리는 벌여놓은 짐들을 단 두 시간 만에 일사불란하게 정리하고 9시에 화암면으로 향하는 전세버스에 올라탔다. 이렇게 빠릿빠릿한 아이들이 아니었다. 두 학기에 걸쳐 부단히 어르고 달랜 결과이자, 18세의 준 어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성장한 아이들의 모습일 것이다.
화암동굴과 삼탄아트마인을 거쳐 오후 5시쯤 고한읍의 한 리조트에 짐을 풀었다. 드디어 실내에서 잠을 자게 된 아이들의 표정에 안도감과 행복감이 역력했다.
"봐봐. 우리는 이제 방바닥에서 잘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었잖니?"
"아, 쌤. 그렇다고 일부러 고생을 시키는 건 좀 아니에요."
"아니.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너희들의 모습을 봐. 정말 대견하고 행복해 보이는걸?"
"아놔. 진짜 말이 안 통하네."
문자 그대로만 보면 투덕거리는 대화이지만 위트와 웃음이 가득한 소통이었다. 그리고 말은 항상 저렇게 툴툴대지만, 세상 어디에 내놔도 잘 살아갈 것 같은 마음이 들 정도로 잘 적응하고 있는 녀석들이다.
▲ 아이들이 직접 준비한 북콘서트 보이는 라디오 형식을 빌어 꾸린 북콘서트 |
ⓒ 안사을 |
북 콘서트는 보이는 라디오처럼 진행되었다. 본교 수석 선생님께서 한 학기 내내 아이들과 고생해가면서 만든 자료들과 진행 대본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진행을 맡은 두 녀석은 어찌나 입담이 좋던지 듣는 내내 귀에 가깝게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1부는 사전 질문지를 추첨하여 두 진행자 관객과 함께 대화하는 시간이었다. 청소년 아니랄까 봐 애정에 관한 질문이 많았다. 40명 중 네 쌍이나 커플이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가장 주목을 받은 커플은 이동 학습을 출발하기 직전에 커플이 된 녀석들이었다.
2부는 드디어 이옥수 작가님과 이원갑 선생님을 모시고 대화하는 시간이었다. 이옥수 작가는 청소년 소설가로서 <내 사랑 사북>이라는 청소년 소설을 통해 사북 항쟁을 세상에 알렸다. 이 책의 화자는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중학교 3학년 순수한 여학생으로, 작가는 이를 통해 사북 항쟁의 처참한 모습을 아이의 눈으로 승화시켜 보여준다.
▲ 보이는 라디오 진행 중 질문에 대한 답변과 그에 대한 피드백이 오가는 중 |
ⓒ 안사을 |
두 분의 뒤편에 있는 하얀 판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미리 만든 질문들이다. 두 분이 직접 고른 질문에 답변하는 시간으로 2부 시간 대부분이 채워졌다. 아이들은 수업의 교재로 삼은 소설을 직접 쓴 작가의 말씀과, 국가 폭력을 직접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이겨낸 산증인의 체험을 직접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래는 질문과 답변을 대화체로 재구성한 것이다. 한 시간에 가깝게 질의응답이 오고 갔으나 대표적인 것 두 개씩만 추려보았다.
"이옥수 작가님에게 질문드리겠습니다. 사북 항쟁을 소설로 쓰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운명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80학번이에요. 사북 항쟁이 80년에 있었던 일이잖아요? 어느 날 OO일보 사회면이 백지로 난 사건이 있었어요. 엄청난 일이죠. 그에 대해 알아보니 사북의 노동자들이 봉기를 일으킨 사건이었던 거예요. 그때 뭔가에 탁 꽂히듯이 사북이 제 마음속에 들어왔어요."
"와(탄성)."
"시간이 흐른 뒤 이제 사북으로 갔어요. 자료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최소한 인터뷰는 해야 하잖아요? 막막한 가운데 어느 분께 사북 사건에 관해 대화를 요청했더니 글쎄, 앞에 있던 바가지로 물세례를 끼얹으시는 거예요."
"헐..."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 그분들이 조사를 받고 고문을 당하고서 나올 때 절대 이 일에 대해 발설하지 않을 것을 협박에 가까운 당부를 받았던 것이죠. 그런 분들께 인터뷰를 요청했으니 더 크게 안 당한 게 다행인 일이었어요."
다음 질문은 이원갑 선생님을 향했다.
"이원갑 선생님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안 좋은 일, 끔찍한 일을 사북에서 당하셨는데요. 현재도 계속 사북에 살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음! 음! 저는 아직도 사북에 살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항쟁에 동참했던 동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받았던 수모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당했던 고문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성고문까지도 있었습니다. 죽고 없어진 사람도 있지만은, 후유증으로 인해 아직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잠시 쉬었다가) 정말이지 미안하고 송구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아... (아이들의 탄식)"
"저는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권고했던 국가의 사과나 특별법 제정이 완료되기 전까지는 눈을 감을 수도 없고 동지들이 함께 있는 이 사북을 떠날 수 없습니다."
▲ 이옥수 작가와 이원갑 선생님 아이들의 사전 질문지에 이원갑 선생님이 답변하고 있다. |
ⓒ 안사을 |
"이번에는 다시 이옥수 작가님께 질문하겠습니다. <내 사랑 사북>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말씀하고 싶었던 바는 무엇인가요?"
"당연히 사북에서 일어났던 부당한 일에 대해 청소년 소설을 쓰는 저의 방식으로 세상에 드러내고 싶었고요... (잠시 침묵) 지금 여러분에게 세 가지를 당부하고 싶어요. 첫 번째는 바로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이 대목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졌다. 이옥수 작가는 모르시겠지만, 우리 학교의 교육 목표가 바로 '나를 사랑하고'라는 대목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말씀이 이어졌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절대 남을 사랑할 수 없어요. 인권이란 게 다른 게 아니에요. 나의 권리를 나 스스로 사랑하고 지키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요. 그리고 너의 인권을 지켜줘야 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의 인권을 지켜줘야 해요. 꼭 이것을 명심했으면 좋겠어요. 또한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잘 나갈 수 있는 자리라 하더라도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라면 하면 안 돼요. 그건 올바르지 않아요."
모두의 고개가 주억거리게 되는 순간이었다. 언제나 듣던 이야기일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날 저녁 우리가 함께 있었던 그 자리에서 이옥수 작가님의 입으로 듣는 말은 매우 새롭고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교사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 온 내용과 다르지 않은 방향성에 위로받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원갑 선생님께 여쭙습니다. 끔찍한 어려움을 많이 당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사북 이야기를 하실 수 있는 원동력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당시 탄광 노동자들은 힘없는 사람, 못 배운 사람, 배경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군가는 광부들에게 공무원 월급의 두세 배를 줬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우리를 시도 때도 없이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회사 사람입니다. 회사 욕을 하다가 걸리면 임금의 3할을 감봉당했습니다. 또 걸리면 그 감봉된 것에서 3할을 또 감봉했습니다. 그런 현실에 분개해서 봉기를 했던 것인데, 법정에 다녀오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원래 회사뿐 아니라 다른 회사에서도 광부로 써주질 않습니다. 결국은 다른 지역으로 가서도 광부 일을 하지 못하고 일용직으로 전전하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 자식들을 제대로 교육을 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노동자들은 그렇게 역시 자식들 또한 못 배운 사람으로 키웠고 똑같은 일용 노동자로 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천추의 한이 되어 이렇게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 여러분들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신의 일이면 참을 수 있습니다. 자식들이 불이익을 받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다면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역시 장내는 숙연해졌다. 기사나 영상으로만 접했던 이원갑 선생님은 과거의 사람이었고 나와는 다른 문제에 대해 투쟁하는 타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만나 생생한 이야기를 들으니, 그는 더불어 살아가는 이 사회의 한 일원이었고 현재를 살아가는 아버지였다.
실내에서 자는 첫날, 아이들은 12시를 기점으로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아침 점호인 7시에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모두 문밖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눈인사를 했다. 함께 만들어 낸 과정 속에서 직접 움직여야 하며 진지한 배움과 체험이 있는 여정 속에서, 일탈과 비행은 없었다. 모두가 프로그램의 주인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혹여 아이들에게 편협한 시각으로 그릇된 계기 교육을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절대 아이들에게 만들어진 자료를 주입하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과 검증된 사료를 제공하고 치열하게 토론할 뿐이다. 사측의 견해를 대변하는 아이들도 심심찮게 나온다. 사장이 되고 싶지, 노동자가 되고 싶은 학생은 드물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거시적 목표와 미시적 목표가 어우러진 길고 복합적인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마치 삶을 경험하듯 배울 수 있는 과정 말이다. 학생들이 그 속에서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맥락을 파악할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 다양한 계층이 더불어 살 수 있는 세상을 바라게 되는 것이야말로 본 융합 수업의 궁극적 목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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