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톤 사무엘 윤 "시 읊을 때도 연기해야 직성 풀린다"
25년 유럽 오페라 무대 선 베테랑
"시의 언어로 스토리텔링이 충분히 가능하다"
29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
슈베르트 가곡의 공연은 보통 이렇다. 무대 위에 성악가 한 명, 피아니스트 한 명. 대부분 정적이다. 하지만 사무엘 윤의 가곡 무대는 그렇지 않다. 어떻게든 극적인 요소를 만들어 표현한다. 보통 가곡 공연이 시(詩)의 내용을 전달하는 낭송에 가깝다면, 사무엘 윤의 가곡은 드라마다.
시에서 드라마를 찾아내는 성악가, 사무엘 윤이 또 한 번 그런 무대를 만든다. 슈베르트ㆍ브람스 등의 가곡을 오케스트라와 함께, 조명과 무대장치를 사용해서 공연한다. 예를 들어 슈베르트 가곡 ‘도플갱어’를 부를 때 그는 오케스트라를 반으로 나눠 그사이에 서서 노래한다. 사랑하는 여인이 없는 텅 빈 집을 바라본다는 시의 내용에 맞춰 시선과 동작을 섞는다. 원래의 곡에 드라마틱한 편곡을 더해 음악적인 변화도 꾀한다. 그 집을 바라보는 이가 자신의 환영이었다는 내용을 음악과 약간의 연기로 표현하는 식이다.
사무엘 윤은 최근 이런 가곡 공연을 하고 있다. 시작은 지난해 9월이었다. 슈베르트 ‘도플갱어’를 비롯해 베토벤, 브람스, R.슈트라우스 등을 바리톤 김기훈과 함께 불렀다. 극적인 가곡 무대였다. 사무엘 윤은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시의 언어와 음악에 스토리텔링으로 표현할 요소가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8월 발트 앙상블 오케스트라와 함께 ‘극적인 가곡’ 공연을 펼쳤다. 이어 이달 29일에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선다.
“예술가곡에서 성악가는 작곡가가 남긴 정보만 전달한다. 음악과 시다. 연기와 극적인 요소는 쓰지 않는다. 하지만 드라마를 통해 전달할 수 있는 감정이 많다.” 그는 이번 공연의 1부에서 브람스 ‘죽음, 그것은 서늘한 밤’ ‘다시 네게 가지 않으리’, 슈베르트 ‘지옥에서 온 무리들’ ‘죽음과 소녀’ ‘마왕’ 등을 부른다. 모두 상실, 고통, 또 죽음과 관련된 노래들이다. 사무엘 윤은 “노래는 서로 연결돼 더욱 깊어지는 고통을 경험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브람스의 노래에서 ‘서늘한 밤’은 ‘칙칙한 낮’과 대비된다. 고통스러운 삶보다 죽음이 평안하다는 뜻이다. 이런 상태를 성악가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가만히 서서 시를 읊듯 노래하는 일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사무엘 윤은 죽음에 다가가는 상태를 연기하며 이 가곡들을 부른다.
가곡의 화자를 하나의 캐릭터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까닭은 그가 천생 오페라 가수이기 때문이다. 사무엘 윤은 1998년 이탈리아에서 데뷔했고, 쾰른 오페라극장의 정단원이 됐다. 지난해까지 쾰른에서 종신 솔리스트로 노래했고 독일 정부에서 궁정가수 칭호를 받았다. 2012년 독일 오페라의 자존심인 바이로이트 축제 개막작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주역으로 발탁돼 화제였다. 이렇게 오페라 무대에 25년 올랐다. 그는 “단역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오페라에서 안 해본 역이 없다. 특히 바그너 오페라에서는 모든 저음 가수 역할을 해봤다”고 했다. 따라서 무대 위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 표현하는 일이 자연스럽다.
가곡을 극화하는 무대는 해외에서도 하나의 흐름이다. 스타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 또한 올 9월 뉴욕에서 슈베르트 ‘도플갱어’에 연출을 더한 무대를 열었다. 뉴욕 파크 애버뉴 아머리에서 60개의 병원 침대를 놓고 그중 하나에서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죽음 앞에서 돌아보는 삶에 대한 내용이었다. 슈베르트의 노래는 드라마의 순간을 품고 있어서 심심치 않게 연출의 대상이 된다. 사랑을 잃고 떠나는 여행을 그린 ‘겨울 나그네’가 특히 음악극으로 자주 무대에 오른다. 메조 소프라노 안네 소피 폰 오터가 슈베르트를 연기하며 ‘겨울 나그네’를 중심으로 드라마를 만든 무대 또한 올 초 DVD로 출시됐다.
사무엘 윤은 “시는 극적이다”라고 주장한다. “오페라의 대사는 대화다. 우리가 대화할 때는 그렇게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반면 시는 자신의 깊숙한 내면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 사랑과 절망에 대한 극적인 고백이다.” 그는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는 노래들을 찾다 보니 끝도 없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표현을 잘하는 성악가가 역할을 할 때 언어가 살아나고 청중의 이해도 깊어진다”고 말했다.
시와 가곡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일은 한편 위험하다. 우선 자의적 해석의 위험성이다. 사무엘 윤은 해석의 폭에 대한 염려를 이해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연출가가 주인공 비올레타의 죽음이라는 결말을 바꾼 적이 있었다. 갑자기 살아나 남미로 발랄하게 여행을 떠나는 장면에서 청중은 거센 야유를 보내며 항의했다.” 그는 시의 언어를 극적으로 살려내 전달하되, 해석의 주도권은 청중에게 넘기려 한다. “직설적인 표현이어서는 안 된다. 내 역할은 각자가 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1부에서 죽음과 상실로 깊이 들어간 후 2부 공연에서는 그의 25년 오페라 무대를 돌아본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서 어딘지 아둔한 귀족, ‘사랑의 묘약’에서 속임수 쓰는 약장수, ‘파우스트’에서 영혼을 사들이는 악마를 거쳐 그의 ‘드림 롤’인 바그너의 신 중의 신, 보탄의 노래를 부른다. 매력적인 캐릭터 사이에서 살았고 이제는 시의 드라마를 아우르는 성악가가 선보이는 무대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朴 "내가 혼외자 터뜨려 채동욱 찍어냈다고?" 처음 입장 밝혔다 [박근혜 회고록] | 중앙일보
- 갈라 디너 참석한 최태원, 동거인 김희영 손잡고 함께했다 | 중앙일보
- 박수홍 측 "큰형 탓 증언 후 혼난 동생…부모가 보지 말자 해" | 중앙일보
- 브리트니 스피어스 폭로 "20여년 전 팀버레이크 아이 낙태" | 중앙일보
- 왜 둘다 화장실이었을까…어느 50대 남녀 슬픈 배려 | 중앙일보
- "퇴장 아니에요" 베트남 감동케 한 손흥민의 스포츠맨십 | 중앙일보
- 옷 벗고 마사지 받으며 회의…에어아시아 CEO 사진 '충격' | 중앙일보
- "칼 갖고와" 알몸 문신남 식당서 난동…테이저건 맞고 체포 | 중앙일보
- 중학생이 40대 여성 납치·성폭행…초등학교서 벌어진 끔찍한 일 | 중앙일보
- "고데기로 얼굴 지져" 25세 배우 극단선택…일본판 더글로리 터졌다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