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2도]불안은 한 사람의 세계를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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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삶의 연속성을 끊어버린다.
"기억은 항상 당시 상황 속으로 물러섰다가 새로운 것을 보면 언제나 반복해서 새로이 깨어나게 된다. 즉 과거의 것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생존자는 기억이 사라질 때조차 결코 (폭력에 대한 기억을) 망각할 수 없다. 폭력은 감각과 표상을 확실히 장악한다. 생존자는 그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 없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표상 능력에 의해 저 멀리까지 퍼져나갈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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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훈 감독, 불안에 무너지는 사람들 그려
미래·희망 없이 남는 건 황폐뿐
폭력은 삶의 연속성을 끊어버린다.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만든다. 세계도 근본적으로 바꾼다. 더 이상 친숙한 고향은 없다. 반복되는 위협의 원천일 뿐이다. 낯익은 것에 대한 신뢰가 붕괴해버렸다. 다른 사람들이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니다. 상실의 체험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김창훈 감독의 영화 '화란'에서 연규(홍사빈)와 치건(송중기)은 깊은 유대 관계를 형성한다. 각자 경험한 폭력이 공감대로 이어졌다. 두 사람 곁에 폭력을 막아주는 보호의 손길은 없었다. 그대로 공포의 심연에 빠져 원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한다. 운명을 함께 나눠 갖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에 의해 무감각한 퇴보 상태에 빠졌다고 오해받는다.
침묵과 불신, 불안은 자기 확신의 파괴로 이어진다. 무력감과 절망이 행동하는 능력에 대한 믿음을 꺾는다. 모든 행동에는 사려와 신뢰가 필요하다. 폭력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무력감의 고통이 치유된 뒤에야 되찾을 수 있다. 그 과정은 너무나 힘들다. 때로는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실패는 새로운 노력을 장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으로 나아가는 권태인 체념에 가까워진다.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연규는 치건처럼 변해간다. 신경과 머리, 사지, 피부를 가리지 않고 쑤셔대는 불안과 고통을 광기로 발산한다. 폭력이 무의식 영역에까지 파고들었다. 그곳에서 활발하게 작용하다 종종 밖으로 튀어나온다. 스스로 통제되지 않는 내적 불안이 육체를 관통하는 순간이다. 동시에 감정 능력도 지체시킨다. 겨우 마주한 기쁨과 향유 능력이 불안과 슬픔에 짓눌려버린다.
독일의 사회학자 볼프강 조프스키는 저서 '폭력사회'에 "분노와 복수에는 대개 힘이 결여돼 있다. 불안이 기억을 잠식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기억은 항상 당시 상황 속으로 물러섰다가 새로운 것을 보면 언제나 반복해서 새로이 깨어나게 된다. 즉 과거의 것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생존자는 기억이 사라질 때조차 결코 (폭력에 대한 기억을) 망각할 수 없다. 폭력은 감각과 표상을 확실히 장악한다. 생존자는 그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 없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표상 능력에 의해 저 멀리까지 퍼져나갈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신체·정신적 무력화는 인간 조건의 황폐화다. '화란'은 형제나 다름없는 관계에 균열을 일으켜 대물림에 제동을 건다. 연규가 육체의 허약함, 의식의 파괴, 실존의 부정 같은 사슬을 끊어버린다. 미래도 희망도 없는 마을(명안시)도 빠져나온다. 그렇다고 화란(和蘭·네덜란드)에 당도할 수는 없다. 여전히 삶이 화란(禍亂)이다. 불안이 과거의 자신과 지금을 꽉 붙들고 매어놓는다.
불안은 부정적 기대 심리가 아니다. 기대라는 것은 어쨌거나 미래를 지향한다. 불안 속에서 시간의 방향은 정반대다. 지각의 장을 협소화하고 당사자가 무너질 때까지 심리적 도피처를 잠식한다. 불확실성으로 몰아넣는데, 그것이 불안을 더욱 증폭시킨다. 그 사이 모든 신뢰와 행동의 기반인 세계의 영속성은 사라진다. 그렇게 시간의 연속성은 또 한 번 파멸한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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