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의 비참한 운명... 왕 화나게 한 장인의 발언
[김종성 기자]
▲ MBC <연인>의 한 장면. |
ⓒ MBC |
병자호란 이후를 다루는 MBC 사극 <연인>에서 소현세자 부부는 통역관 겸 상인인 주인공 이장현(남궁민 분)과 긴밀한 관련을 갖는다. 청나라 수도 심양에 인질로 끌려간 강빈(전혜원 분)과 소현세자(김무준 분)는 의심도 하고 신뢰도 하면서 이장현에게 깊이 의존한다.
1637년에 심양으로 끌려간 소현세자의 인질 생활은 1645년에 끝났다. 그는 심양에 있는 동안에 청나라 조정과 가까워져, 본국의 아버지로부터 의심을 샀다. 그런 상태로 귀국했다가 2개월 만에 독살로 의심되는 죽음과 33년 인생을 마쳤다.
이 시기는 병자호란을 계기로 조선이 최강국 청나라의 영향권에 들어간 뒤였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와 가까워진 것은 소현세자의 강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약점이 됐다.
몽골 간섭기 때는 몽골의 입김에 의해 고려 왕위가 자주 교체됐다. 일례로, 충렬왕은 세자 왕장(王璋)이 몽골 황실의 부마가 되고 그들의 지지를 받은 뒤 그 기세에 눌려 왕위를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1298년에 왕이 된 인물이 충렬왕의 세자인 충선왕이다.
그런데 얼마 뒤 충선왕이 몽골의 미움을 사서 끌려가자, 충렬왕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왕위를 되찾았다. 이때는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긴 지 7개월 뒤였다. 이 같은 충렬왕의 실각과 복위는 1298년 한 해 동안에 벌어졌다. 그 뒤 충렬왕은 아들을 제거해 후환을 없애려 했지만 실패했다. 1308년에 충렬왕은 사망했고 충선왕이 다시 즉위했다.
이런 사례들이 있었기 때문에, 몽골 간섭기 때처럼 유목민 왕조의 간섭을 받게 된 인조 정권은 소현세자의 동향을 당연히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소현세자가 한양이 아닌 심양에 있었고 거기서 청나라의 지지를 받았으므로, 인조가 어느 날 갑자기 상왕으로 밀려날 가능성을 경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 MBC <연인>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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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 사망 당일에 기록된 음력으로 인조 23년 4월 26일자(양력 1645년 5월 21일자) <인조실록>은 의원이 함부로 침을 놓고 약을 처방한 뒤 세자가 갑자기 죽었다고 기술했다. 이 실록의 같은 해 6월 27일자(양력 7월 20일자) 기록은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고 묘사했다. 병자호란에서 패전한 조선을 대표해 8년간 인질 생활을 하다가 귀국한 소현세의 최후는 이처럼 씁쓸하고 비참했다.
그런데 불행은 세자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다. 세자가 죽은 뒤에는 부인 강빈이 시아버지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세자빈에서 폐위되고 사약을 받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인조 24년 3월 15일자(1646년 4월 30일자) <인조실록>은 소현세자 사망 이듬해에 벌어진 이 상황을 요약하면서 "그 죄악이 아직 훤히 드러나지 않았는데도 그저 추측만으로 법을 집행했기 때문에 도성 안팎의 민심이 승복하지 않았으며"라고 기술했다. 시아버지가 확실한 증거도 없이 며느리를 처형한 일로 인해 민심이 뒤숭숭했던 것이다.
화는 이 부부의 아들들에게도 미쳤다. 그중 하나는 훗날 세자가 되고 주상이 됐을 소현세자들의 아들들도 할아버지에 의해 유배를 가게 됐다. 소현세자 가족은 이처럼 철저히 짓밟히고 말았다.
소현세자는 아버지의 의심을 사는 위태로운 아들이었지만, 그래도 엄연한 세자였다. 거기다가 청나라의 지지까지 받았다. 그렇지만 귀국 뒤 허무하게 죽었고, 그 가족까지 불행에 빠졌다.
▲ MBC <연인>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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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빈 집안은 인조 쿠데타(인조반정) 이후의 집권세력인 서인당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이 가문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권력 중심부에서 밀려났다. 호란을 계기로 득세한 쪽은 청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한 주화파였다. 이 가문은 주화파의 반대쪽인 척화파로 분류됐다.
강빈의 아버지인 강석기(姜碩期, 1580~1643)는 병자호란 이전인 1627년 정묘호란 때 척화론으로 두각을 보였다.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인조 5년 2월 18일자(1627년 4월 3일자) <인조실록>은 그가 인조 앞에서 척화론을 역설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 자리에서 강석기는 오랑캐에 대한 굴복을 "개·양에게 애걸(哀乞於犬羊)"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지금 시대 사람들 같으면 '개·돼지'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강석기는 그 시대 감각대로 '개·양'을 운운하며 인조를 비판했다. 그렇게 임금의 심기를 건드린 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꿔서 화의(和議)를 배척하소서"라고 호소했다.
'개·돼지'까지 운운하며 화친 논의를 배격하는 강석기의 주장은 인조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다. 이 점은 25일 뒤 인조의 발언에서 나타났다.
음력으로 그해 3월 13일(양력 4월 28일)에 정권 원로인 김장생(1548~1631)을 불러들인 인조는 척화파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이 날짜 <인조실록>에 따르면, 인조는 "척화 논의를 어찌 그르다 할 수 있겠느냐마는"이라면서도 "나를 가리켜 오랑캐에게 항복한 자라고 말하는 것은 심하지 않은가"라고 불평했다.
이때 인조는 자신을 불쾌하게 한 신하가 누구인지를 거명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김장생은 누구를 지칭하는지 이해했다. 김장생의 입에서는 "강석기는 신의 근친입니다"라며 "요즘 세상에 흔히 않은 사람입니다"라는 비호의 말이 나왔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강석기는 병자호란 뒤인 1640년에 청나라가 대표적 척화파인 김상헌을 압송하려 했을 때도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최강국인 청나라를 상대로 이렇게 했으므로, 왕실 외척 강석기는 요즘으로 치면 반미를 외치는 대통령 사돈이었다.
그래서 강석기 가문은 병자호란 이후에 권력 중심부에 들어가기 힘들었다. 이는 강석기의 딸과 사위가 1645년 이후에 정치적 보호를 받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는 한 가지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친했으므로 친청파에 속하면 속했지 반청파에 속하지는 않는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장인이 척화를 주장했기 때문에, 친청파 입장에서는 소현세자를 완전한 자기 편으로 대하기 힘든 측면이 있었다.
그것에 더해, 김자점이라는 권신의 정치적 부각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주화파 수준을 뛰어넘어 '청나라에 빌붙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친청파 김자점이 1644년부터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고 1646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이런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소현세자 가족이 불행을 겪은 시기는 친청파의 권세가 매우 강할 때였다. 강석기와 연결된 소현세자 가족의 정치적 보호막이 약해진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김자점은 강빈 처형을 주장해 소현세자 아들들을 더욱 곤란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그 일가족의 불행은 한국사의 주요 비극이다. 이들이 정치적 보흐를 제대로 받지 못한 데는 인조의 외면과 더불어 강석기의 정치 성향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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