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가 안에 이토록 다양한 도시라니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2023. 10. 18.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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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탈리아라는 질문

[김찬호 기자]

북쪽으로 향할수록 풍경은 달라졌습니다. 산과 초원이 펼쳐진 풍경이었습니다. 분명 이탈리아 남부와는 다른 색이었습니다.

그렇게 밀라노에 도착했습니다. 기차역에서 숙소까지는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걷기를 선택했습니다. 이 도시의 모습을 더 살펴보고 싶었거든요. 밀라노는 놀라운 도시였습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며, 도시의 모습이 변해가는 것은 분명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밀라노는 예상보다도 더 부유한 도시더군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 쇼핑몰
ⓒ Widerstand
밀라노는 이탈리아 북부의 최대 도시입니다. 인구수로는 이탈리아 전체로 따져도 로마에 이어 제2의 도시죠. 
인구수로는 로마에 밀리지만, 밀라노의 경제력은 결코 로마에 밀리지 않습니다. 사실 오히려 밀라노가 속한 롬바르디아 주는 로마가 속한 라치오 주를 압도하는 경제력을 가지고 있죠. 롬바르디아 주의 GDP는 4,687억 유로에 달하지만, 라치오 주의 GDP는 2,000억 유로 수준입니다.
밀라노 뿐만이 아닙니다. 이탈리아 북부의 밀라노, 토리노, 제노바의 세 개 도시는 이탈리아 경제의 핵심이 되는 곳이죠. 이탈리아의 주요 대기업은 이들 지역에 본사를 둔 경우가 많습니다. 이탈리아의 증권거래소인 '보르사 이탈리아나'도 수도 로마가 아닌 밀라노에 위치해 있습니다.
 
 밀라노의 밤
ⓒ Widerstand
밀라노가 이탈리아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 것은 아주 오래된 일입니다. 고대 로마 제국에서도 마찬가지였죠. 
고대 밀라노는 "메디올라눔(Mediolanum)"이라고 불렸습니다. 로마 제국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북쪽으로 향하는 교통로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죠.

메디올라눔은 한때 서로마의 수도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286년, 로마 제국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의 거처를 로마에서 메디올라눔으로 옮깁니다. 당시 이미 로마는 '군인 황제 시대'라는 혼란을 겪고 있었거든요. 49년 동안 황제 자리를 거쳐간 사람만 26명에 달하는 내전과 분란의 시대였습니다.

강성한 귀족 세력의 힘을 피해 이러한 내분을 수습하기 위한 조치가 수도의 이전이었습니다. 물론 로마 제국의 중심지는 여전히 로마였지만, 황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정치는 이제 밀라노로 그 현장을 옮기게 된 것이죠.

게다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곧 '사두정치'라는 체제를 도입합니다. 말 그대로 로마 제국을 네 명이 나누어 다스린다는 것이죠. 그는 밀라노를 막시미아누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동방의 이즈미트로 다시 자리를 옮깁니다. 로마의 무게추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옮겨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스포르체스코 성
ⓒ Widerstand
그러니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인정하는 중요한 선언이 밀라노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이상할 일은 없겠죠. 313년, 밀라노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에 대한 박해 중단을 선언합니다. 이것을 '밀라노 칙령'이라고 부르죠. 
동서 로마를 모두 차지한 콘스탄티누스는, 이듬해 동방의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전란의 피해를 서서히 회복한 로마는 다시 서로마의 중심지 자리를 되찾았죠. 하지만 로마 제국의 기능은 이미 동방으로 옮겨간 뒤였습니다. 100여 년이 지나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두오모 광장
ⓒ Widerstand
그러나 밀라노의 번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북부의 중심 도시로 성장해 나갔죠. 직물 공업을 중심으로 산업은 크게 발달했습니다. 지중해나 이탈리아 반도를 유럽 대륙과 잇는 무역로의 핵심 도시가 되었죠. 
그러니 다양한 국가가 이 도시를 노리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에 들어선 여러 지방 정권이 밀라노를 두고 각축전을 벌였습니다. 여기에 힘을 키워나가던 프랑스나 오스트리아도 한때 밀라노를 차지하기도 했죠.
19세기 밀라노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859년 인근 토리노에 기반을 둔 사르데냐 왕국에 합병되죠. 이탈리아 통일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사르데냐 왕국은 남진을 계속했고, 결국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뒤 이탈리아 왕국을 세웠습니다.
 
 밀라노 대성당
ⓒ Widerstand
밀라노는 그 이후로도 이탈리아의 경제 중심지로서 기능했습니다. 현대사의 전란을 거치면서도 그 지위는 거의 위협받지 않았죠. 앞서 언급했듯 밀라노는 지금까지도 이탈리아의 독보적인 경제 도시입니다. 
밀라노의 부와 자유는 정치적 격동과는 큰 관련이 없었습니다. 밀라노가 정치적 중심지의 지위를 상실한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입니다. 이후 밀라노는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았죠. 통일 과정에서는 이웃 사르데냐 왕국에 이른 시기 병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밀라노의 산업과 경제력은 이어졌습니다.
당장 근대에 접어들며 밀라노에 여러 전란이 벌어졌지만, 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밀라노에서 활동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밀라노에는 레오나르도의 대표작인 <최후의 만찬>이 남아 있기도 하죠. 그 역시 전란에 휘말려 투옥까지 당했지만, 결국 다시 밀라노로 돌아와 활동합니다.
 
 <최후의 만찬>이 있는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
ⓒ Widerstand
그런 경제 도시로서의 역사가 깊기 때문일까요. 밀라노의 모습은 분명 이탈리아 남부에서 봤던 것과는 분명 달랐습니다. 도시를 조금만 걸어도 넓은 거리가 나타났고, 정비된 도심이 보였습니다. 화려한 매장을 가진 높은 쇼핑몰이 있었죠. 
물가도 많이 올랐습니다. 대중교통 요금은 북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오르더군요. 결국 밀라노에 도착하니 지하철 요금이 나폴리의 두 배가 되었습니다.

나폴리뿐 아닙니다. 오래된 도시 구조가 그대로 남은 로마와도 달랐습니다. 작은 관광 도시가 된 피렌체와도 달랐죠. 섬을 연결해 만든 베네치아와도 이 내륙의 도시는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다양한 도시의 모습이 모두 현대의 이탈리아입니다.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지방이 모여 만든, 이탈리아라는 연방의 모습입니다.
 
 미켈란젤로 상
ⓒ Widerstand
이탈리아 통일 이후 벌써 150년이 흘렀습니다. 아마 앞으로 그만큼의 시간이 또 흘러도, 이탈리아 반도 곳곳의 도시는 여전히 다른 모습이겠죠. 이들은 결코 단일한 경관을 가진 하나의 나라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탈리아의 목표도 아닙니다. 
현대 이탈리아의 본질이란 그렇습니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다양한 지역을 있는 그대로 묶어낸 것이 현대의 이탈리아입니다. 이들의 화학적 결합과 단일한 국가로의 변화는 현대 이탈리아가 갈 방향도 아닙니다. 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역사적 경험은 골목 곳곳에 남아 도시의 유산으로 이어질 테니까요.

다만 이탈리아는 우리 세계에 하나의 의문을 던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토록 다양한 지역과, 도시와, 사람이, 어떻게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살아갈 수 있을지. 그 실험과 결과를 전달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

현대 이탈리아 정치는 그 의문에 답할 수 있을까요? 이들은 실험을 성공으로 이끌 능력을 갖고 있을까요? 이탈리아는 나폴리에도, 밀라노에도 만족스러운 조국이 될 수 있을까요? 나폴리의 낡은 버스 안에서도, 밀라노의 화려한 도심에서도, 그 의문은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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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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