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노숙자가 되어도 걱정할 것이 없다"

김성수 2023. 10. 18.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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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유학생 부부를 응원하던 영국의 장인어른... 그를 떠나보내며

[김성수 기자]

26년 전인 지난 1997년 나는 영국에서 박사과정 학생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오랫동안 일본을 아주 미워했었습니다. 한국현대사 전공자로서 일제강점기 일본이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잔인함과 악랄함을 한순간도 잊어 본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영국 쉐필드 대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일본문학 박사과정을 전공하는 한 영국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반체제 인사들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1992년부터 1995년까지 3년간 도쿄에 살면서 일본 반체제 인사들과 가까이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수감되고, 고문 받다가 몸과 맘이 망가지거나 인생이 파괴된 일본인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한 인간이 단순히 어느 국가나 민족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그 인간을 미워하거나 증오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한국인 중에도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인 함석헌(1901~1989)이나 장준하(1918~1975)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 독재자인 박정희(1917~1979)나 학살자인 전두환(1931~2021)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후 역사와 현실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도록 내 고정관념을 가차 없이 깨뜨려 준 그 영국 여성과 나는 자연스레 가까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느 덧 우리의 장래도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내가 "학위를 마치는 데로 모국에 돌아가 모국을 위해 무언가를 공헌할 계획"이라고 귀띔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997년 10월 1일 그녀는 내게 "결혼 해 줄래?"라고 청혼했습니다. 그 말은 그녀가 자신의 여생을 낯선 동방의 나라 한국에서 나와 함께 살 결심을 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당시는 요즘처럼 '한류'가 없어서 보통 영국인들은 한국과 북한을 잘 구분하지 못 할 정도로 한국은 영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한반도에 관한 뉴스는 거의 북한미사일 발사 소식이 주류를 이룰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기꺼이 내게 청혼을 했고 주말에 한 번 그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1997년 가을 어느 날 주말에 나는 그녀의 부모님을 뵙고 인사들 드리려고 그녀와 함께 영국 중부지방 레스터셔를 찾았습니다.

그녀의 부모님은 딸이 지난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도쿄에 살고 있는 동안 매년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저와 함께 잠시 인사를 나눈 그녀 부모님은 뜬금없이 내게 "일본인들은 키가 작던데 한국인들은 키가 큰가?"라고 물어 보셨습니다. 내 키가 181cm라 그렇게 물어보신 것 같았습니다. "아, 한국에서 저는 작은 편에 속합니다"라고 나는 천연덕스럽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녀 부모님은 잠시 어안이 벙벙하신 것 같았습니다.

차를 마시면서 부모님께 나와 결혼한 후에 여생을 한국에서 살 계획이라는 딸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 부모님의 반응은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향후 보장된 것이 하나도 없이 불투명한 그저 가난한 박사과정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딸의 결혼과 '불안한' 장래계획을 들은 그녀 어머니는 당연히 좀 염려스러워 하는 기색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녀 아버지는 선뜻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면 노숙자가 돼도 걱정할 것이 없다."

그 후 우리는 곧 영국에서 결혼했습니다. 장인장모께서 가난한 학생인 우리 신혼부부를 위해 결혼 비용을 전부 지불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IMF 경제위기로 내 부모님은 한국에서 우리 결혼식에 오실 수 없었습니다.
 
 장인이 딸에게 우유를 먹이시는 모습
ⓒ 김성수
 어린 시절 아들과 장인장모
ⓒ 김성수
 
한국에서 여생을 살고자 했던 우리의 꿈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1남 1녀를 두고 이제 영국에서 나마 행복을 가꾸며 살고 있습니다. "인생이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다"는 뼈아픈 교훈을 되새기면서 말입니다.

어느덧 우리 부부가 함께 한 지 26년의 세월이 훌쩍 흘렀습니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10월 13일) 저녁 6시경 장인은 노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내와 나는 함께 장인의 임종을 마지막까지 지켜봤습니다.

1932년 런던 출생인 장인은 2차세계대전 중인 지난 1942년 뇌막염으로 두 살 많은 형을 잃었습니다. 형은 당시 장인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고 합니다. 형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장인은 당시 너무 마음이 아파서 이 다음에 크면 '꼭 의사가 되어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데 전력하겠다'고 깊이 다짐하셨답니다. 그리고 2차 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 말 마침내 그 꿈을 이루어 런던의 한 병원에서 장인은 의사로 일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같은 병원에서 동료 간호사로 일하시던 장모와 결혼하시고 낳은 첫 딸이 제 아내입니다.

지난 해 봄 우리부부는 런던 북부의 장인이 태어난 생가를 장인과 함께 찾았습니다. 그 동네 묘지에 있는 장인 형의 묘지도 함께 찾았습니다. 장인은 지난 1942년, 12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가장 '가까웠던 친구'였던 형의 묘지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리셨습니다.

장인은 평생 의사였지만 의사들의 파업을 늘 반대하셨습니다. 장인은 의사가 환자를 돌보는 것,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은 돈보다 훨씬 고귀한 것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최근의 우리가족
ⓒ 김성수
 
26년 전인 지난 1997년, 직장도 없고 아무것도 보장된 미래가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동방에서 온 나와 결혼해 여생을 한국에서 살 계획이라는 딸에게 선뜻 "서로 사랑하면 노숙자가 돼도 걱정할 것이 없다"고 격려해주고 위로해 주신 장인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요즘 돈 때문에, 직장 때문에, 또 여러 조건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를 주저하는 모국의 젊은 청춘들에게 나도 장인이 26년 전에 나와 아내에게 선뜻 해 주신 그 말씀을 꼭 해 주고 싶습니다. "서로 사랑하면 노숙자가 돼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 장인을 떠나보내며 영국의 장례문화 중 한국과 다른 것 몇 가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영국인들은 보통 장례보험을 듭니다. 평소 일시금으로 낼 수도 있고 분할에서 낼 수도 있고(우리 부부는 이미 일시금으로 냈습니다). 그래서 집안에 누가 돌아가시면 유족이 장례회사에 전화 한통을 하면 와서 모든 것,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친절하게 해결해줍니다. 모든 장례 절차와 장례식, 음식(주로 샌드위치, 과자, 커피, 차 등 간단한 음식). 그래서 장례식에 오는 분들은 조의금을 1원도 안 냅니다. 다만 갑자기 누가(특히 젊은 사람이) 자살하거나 할 경우는 장례 비용을 지불하느라 유족이 급하게 돈을 모금하는데 이런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영국 생활 33년 중 딱 한 번 경험).

2. 망자가 생기면 국가에서 100% 시신에 대한 부검을 합니다(무상의료). 그래서 의사의 사망진단과 사인이 일치하는지 교차검증을 하고 기록으로 남깁니다. 유교문화에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영국에서는 부검과 더불어 장기 기증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우리 부부도 사망 시 장기를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3. 부검을 마친 시신을 냉동고에 일단 보관하고 장례식은 사망일로 부터 몇 주 혹은 몇 달 뒤에 유족들이 편리한 날짜에 정합니다. 3일장이니 5일장이니 하는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즉 망자보다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장례 절차를 진행합니다.

4. 장례식 중 보통 유족이나 지인 한두 분이 나와서 고인에 대해 몇 분 정도 일화 등을 소개 합니다. 그 후 고인이 좋아했던 음악을 틀어주거나 시를 낭송하기도 합니다.

5. 공공건물인 병원에서 유족이나 지인이 환자에 대한 간병을 하거나 간이침대를 놓고 환자 옆에서 잠을 잘 수 없습니다. 훈련받은 의료 인력만(의사 간호사 등)이 환자를 돌 볼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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