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3 송강호가 ‘넘버원’이 된 비결 [홍종선의 연예단상㉙]

홍종선 2023. 10. 18.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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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넘버3’ 조필이 ‘거미집’ 김열이 되기까지…새로움에 대한 끝없는 탐구
배우 송강호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넘버원: 첫째나 으뜸. 또는 그런 사람이나 물건.

영화든 드라마든 기획 당시부터 감독과 제작자, 투자자까지도 ‘1번 배우’ 혹은 ‘공동 주연’으로 인식하는 배우가 있다. 아무리 멀티캐스팅 작품이라 해도 1번은 있다. 캐스팅이 잘되면 그 생각은 더욱 공고해지고, 실제로 관객이나 시청자도 그렇게 인식한다.

드물게 예외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 영화 ‘넘버3’의 배우 송강호가 그렇다. 송강호에게 보스까지 합해야 4명에 불과한 불사파 조직의 보스 조필이 맡겨졌다. 조연이었다.

영화 ‘넘버3’에서 배우 송강호의 더듬는 말투와 이소룡의 기합을 연상시키는 발성으로 돋보였던 캐릭터 조필 ⓒ이하 시네마서비스 제공

사실 영화 ‘넘버3’는 폭력조직 도강파의 넘버원을 노리는 서태주(한석규 분)의 얘기다. 조직에서 별다른 존재감 없던 태주는 보스(안석환 분)를 죽이려는 하극상 쿠데타에서 보스를 대피시킨 공로로 조직 내 서열이 급상승해 넘버3에 오른다.

깔끔한 이미지의 태주는 시대변화에 따른 폭력조직의 기업화에 딱 맞고, 재떨이를 무기로 사용하는 넘버2 재철(박상면 분)은 시대에 역행하는 인물이다. 5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 태주는 보스의 총애를 받는 자신이 넘버2라고 생각하지만, ‘빡치게도’ 여전히 넘버2는 재철이고, 그렇기에 자신을 넘버3 취급하는 자들은 용납하지 않는다. 태주의 목표는 장차 쿠데타가 아니라 정식으로 조직의 보스가 되는 것인데, 한낱 재철에게 밀려서도 안 되고 이미 스스로 넘버2이기 때문에 이번 호텔 인수 건만 잘 처리하면 모든 게 순탄대로인 상황이다.

그런데 검사 마동철(최민식 분)이 등장한다. 마 씨 성의 공무원들이 모두 센 것도 아닐 텐데 ‘범죄도시’ 시리즈의 경찰 마석도(마동석 분)의 원조 격이라도 되듯 마동철 검사는 나름 주먹도 맷집도 세고, 돈으로는 매수도 되지 않는 인물로 태주에게는 골칫덩어리다. 그걸로도 모자라 한 아파트에 산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신경을 긁어온다.

주차장에서 만난 태주(한석규 분)와 일대일로 한판 붙은 조필(송강호 분) ⓒ

우리는 그때 분명 태주, 한석규의 연기를 즐겼다. 당시의 배우 한석규가 누군가. 성우로 시작해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후남이(김희애 분)를 따스하게 대하는 인간미 넘치는 청년으로 눈도장을 찍고 ‘서울의 달’로 신드롬을 일으킨 후 충무로로 무대를 옮겨 영화 ‘닥터봉’ ‘은행나무 침대’ ‘초록물고기’를 통해 대세 배우로 떠오른 뒤였다. 실제로 1997년은 한석규가 한 해 동안 ‘초록물고기’ ‘넘버3’ ‘접속’을 연달아 흥행시킨 해였다.

태주의 맞수 마동철 역의 최민식은 또 어떤가. 연극계 실력파 괴물을 드라마에 데려왔다는 입소문과 함께 ‘야망의 세월’에서 꾸숑 역으로 단박에 주목받았고, ‘서울의 달’을 통해 한석규와는 전혀 다른 매력으로 삶의 페이소스를 표현하며 박수받았다. 영화로는 ‘조용한 가족’에서 무시무시한 삼촌 역을 맡아 남다른 존재감으로 충무로에 연착륙한 상황이었다.

다른 걸 떠나서 드라마 ‘서울의 달’ 브라더스가 영화 ‘넘버3’를 통해 재회한 상황에서, 두 배우 모두 향후 행보를 통해 각인시킬 테지만 보통의 연기력을 지닌 배우들은 아닌 상황에서, 공동 주연도 아닌 조연 배우가 빛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 같은 일이다.

와신상담 시절의 불사파 ⓒ

그 별을 송강호가 땄다. 배우 송강호는 너무나 인상 깊게, 말을 덜덜덜 더듬으면서도 무서운 카리스마를 뽐내며 새로운 방식의 조폭 연기를 선보였다. 태주네 도강파 보스 제거를 의뢰받은 바로 그 조직, 새내기 조직 불사파의 보스였다.

맡은 바 임무도 실패했고, 5년을 산에서 개구리 잡아먹고 뱀 잡아먹으며 재기를 노렸으나 소문이 가시지 않았는지 일거리 하나 들어오지 않아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 수하들에게 밥은 못 먹여도 욕과 매는 먹이는 보스인데 셋 뿐이기는 해도 조직원들은 절대적 복종을 보이고, 조필은 마치 사이비 교주처럼 조직원들을 장악하고 있다. 본 적 없는 캐릭터였고, 본 적 없는 특이한 발성과 어투의 연기였다.

세월이 20년 넘게 흐르는 동안 송강호를, 송강호가 연기한 조필을 ‘넘버3’의 넘버원으로 만들어 준 건 관객과 대중의 공이 컸다. 오랜 시간 동안 대중은 유독, 죽어도 넘버3로 불리는 게 싫은 서태주나 깐족깐족 태주를 괴롭히는 마동필보다 조필을 기억했고 따라 했다. 누리꾼들은 ‘조연적 주연배우’라고 부르며 조필을, 배우 송강호를 사랑했다.

영화 ‘택시운전사’로 1281만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괴물’ ‘변호인’ ‘기생충’도 천만영화다. ‘기생충’은 제72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거머쥐었다. ⓒCJ ENM 제공

송강호는 이후 한국 영화배우의 ‘넘버원’으로 성장했다. 단지 연기를 최고 잘한다는 뜻이 아니다. 연기는 각자의 색깔로 저마다의 향기로 잘하는 배우가 많고 서열을 매기기 어렵다. 한국 남자배우 최초로 지난해 5월, 제7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영화 ‘브로커’로 남우주연상을 타서도 아니다. 한국 배우 중 최다, 지난 2006년 ‘괴물’을 시작으로 올해 ‘거미집’까지 8번 칸의 초청을 받아서만도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물론이고 세계인들이 가장 많이 아는 한국의 배우, 2023년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개성적 연기력이 관객을 압도했기 때문일까. 흔히 캐릭터 자체가 되는 메소드연기를 최고라 생각하던 시절, 극단 연우무대에서 기본기를 닦은 송강호는 스크린으로 넘어와 캐릭터에 다가가기보다는 캐릭터를 자신에게 데려와 특유의 개성을 입혀 연기했다. 새로웠다.

시작부터가 그랬다. 영화 ‘초록물고기’에서 막동(한석규 분)을 때리는 배태곤(문성근 분)의 꼬붕 판수로 출연했을 때도 ‘진짜 조폭을 섭외한 거냐’는 말이 나왔다. 앞서 말한 ‘넘버3’에 이어 ‘쉬리’까지 ‘조연적 주연배우’로서 활약한 후. 첫 번째 주연인 ‘반칙왕’을 시작으로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살인의 추억’ ‘괴물’ ‘우아한 세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박쥐’ ‘의형제’ ‘설국열차’ ‘관상’ ‘변호인’ ‘사도’ ‘밀정’ ‘택시운전사’ ‘기생충’ 등 오래도록 우리가 잊지 못할 영화 혹은 흥행작을 내놨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영화 ‘브로커’에 이르면, 일본인 감독인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대신해 영화 안에 들어와 자리 잡은 듯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하나의 캐릭터라기보다 감독의 현신 같았다.

영화 ‘거미집’에서는 한 발 또 나아갔다. 결말을 바꾸면 걸작이 되리라는 환상에 사로잡힌 감독 김열을 연기했는데. 하나의 캐릭터라기보다 ‘꺾이지 않는 마음’을 통해 감독으로 대변된 예술가가 뭐 하는 사람이고 예술이 무엇인지를 ‘손에 잡히게’ 보여줬다. 마침내 영화가 산업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사실을, 예술이어야 한다는 당위를 우리 눈앞에서 외쳤다. 하나의 캐릭터가 아니라 영화 ‘거미집’이 만들어진 이유, 영화 ‘거미집’이 말하는 주제 의식 자체가 김열이고 송강호였다.

넘버원 선배의 사명감 ⓒ이하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이런 역사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영화 ‘거미집’(감독 김지운, 제작 앤솔로지스튜디오, 공동제작 바른손스튜디오·루스이소니도스, 배급 ㈜바른손이앤에이)으로 기자들을 만난 배우 송강호의 말에서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비결이나 비법이 아니라 사명감에 가까웠고, 배우로 살아가는 송강호의 철학이었다.

“아이고 저는 그렇게(넘버원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먼저 연기를 시작한 선배로서의 선배로서 책임감, 책임감이라는 말도 거창한데 한 가지 생각은 있습니다. ‘이번 영화는 천만을 넘겨봐야지’ 이런 생각이 아니라 ‘아, 이번에 어떤 작품, 어떤 가치가 있는 작품을 할까’ 하는 거지요. 후배들이 ‘아. 송강호 선배가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가는 모습을 보이는구나’ 생각할 수 있는 모습. 실패하더라도 결과가, 결과를 떠나서 그런 모습들이 동료나 후배 배우들에게 비추어지면 그것이 선배로서의 그 어떤 태도가 아닐까 생각은 하고 있죠. 양적이든 질적이든 성취를 해야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움에 대한 탐구, 발자취 남기려 애쓰고 계시구나’ 하는 느낌을 주고는 싶습니다.”

송강호는 어떤 배우로 남고 싶으냐는 질문에도 “끊임없이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내딛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자연인으로서도”라고 대답했다. 평소 늘 생각하는 생각, 뿌리 깊은 철학이기에 즉답으로 나오고 간결하게 정리가 돼 있었다.

영화 ‘거미집’ 촬영장에서 활짝 웃는 배우 송강호. 소년의 미소다 ⓒ

경청하며 되짚어 보니 송강호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에서 성기 노출 연기도 불사했다. 당시 시사회에서 “이런 첫 시도가 배우 송강호의 표현으로 이뤄졌다는 것이 다행이고 타당하게 느껴진다”고 운을 떼며 질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배우 송강호가 말하는 진일보,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내딛으려는 시도와 탐구 자세를 비단 획기적이고 충격적 연기에 국한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2023년 오늘 얕은 입소리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이미 14년 전에도 그 실험정신은 실천으로 옮겨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자 함이다.

‘넘버원’ 송강호의 오늘을 있게 한 그 진일보, 새로운 것을 향한 도전은 영화 ‘거미집’에 응축돼 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한 발을 딛었다. 배우 이력에 없던 첫 드라마 출연이다. ‘거미집’의 각본을 쓴 신연식 감독에 대한 신뢰 속에, 그가 연출하는 ‘삼식이 삼촌’으로 우리를 찾는다. 배우 송강호의 새로움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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