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68세, 셋집에서 굶어죽다

김삼웅 2023. 10. 18.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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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잊혀진 선각자, 묵암 이종일 평전 41]

[김삼웅 기자]

 묵암 이종일 선생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감옥에서 나온 '민족대표들'은 처신이 쉽지 않았다. 국민들은 외경의 마음으로 지켜보고, 일제는 '불령선인'으로 낙인찍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만큼 행동에 조심해야하고 언행에도 신중해야 했다.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도 힘든 삶이 계속되었다.

제2독립선언을 추진하다 문건이 압수되고 활동이 제지당한 이종일의 충격은 컸다. 매사에 담대하고 호방하여 절망을 몰랐던 그에게 이번의 좌절은 재기할 기력마져 빼앗겼다. 마음속에 울혈이 쌓이고 그동안의 옥살이와 고문, 돌보는 가족이 없어 부실한 식생활, 60대 후반의 나이와 무엇보다 침체된 조선사회의 절망적인 분위기도 한몫을 하였다.

일제가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미명 아래 자행한 통치는 더욱 악랄해지고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는 갈수록 간교해졌다. 변절자가 속출하고 밀정이 들끓었다. 이웃간에 믿음이 사라지고 패배의식이 심화되었다.

이종일의 생계는 극심했다. 그동안 민족사적인 사명의식에서 많은 일을 해왔지만 사복을 채울 줄 몰랐고 이해타산에 서툴렀다. 안온한 생활은 없었으나 타고난 맑은 정신과 고결한 성품은 재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옥파는 몸소 검소한 생활에 철저했다. 그는 콩죽을 주식으로 했다. 쌀밥이 밥상 위에 올라간 일이 없다고 해도 그리 과언이 아닐만큼 쌀밥 먹는 것을 큰 죄나 짓는 것처럼 여겨왔다.

그는 손녀(이장옥)에게 말한 적이 있다.

"2천만 우리 동포가 굶주리는 이 마당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신명을 바친다는 내가 어찌 쌀밥을 먹을 수 있겠느냐"면서 끼니를 거의 콩죽으로 했으며 그것이나마 하루 두 끼니에 그쳤다.

말 수가 적고 묵묵한 옥파가 즐기는 음식이라면 술을 가까이 했다는 것을 대종으로 꼽을 수밖에 없다. (주석 79)

손녀 이장옥의 증언.

가끔 집에 들르실 때 할아버님은 저의 손을 잡으시면서 "불쌍한 것, 할애비가 독립운동을 하고 있으니 너도 언제 환란을 당할지 모르겠구나" 하시면서 고개를 돌리시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런데 집안 식구를 이곳 저곳에 맡겨 놓으신 것은 독립투쟁을 하시다가 일제에 체포될 경우 언제 사형이 되거나 옥수가 되어도 후고(後顧)를 없게 하기 위한 깊은 고려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경운동에 살고 있었습니다.

3.1운동 며칠 전인 1919년 2월 23일 보성사로부터 은밀히 운반된 독립선언문 인쇄물은 집안에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그때부터 여러 사람들이 드나들며 할아버님으로부터 몇 백 장 혹은 몇천 장씩 선언문을 받아가지고 나갔습니다.

할아버님이 안 계실 때면 내가 책임지고 독립선언문을 내주었습니다. 그때 어린 마음에도 우리나라는 반드시 독립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집에 드나드는 청년들의 얼굴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주석 80)

이종일은 후손이 없었다. 동생 이종칠의 아들 이학순을 양자로 입적시켰으나 옥고를 치루는 동안 양자도 사망하고 손자도 없었다.

<제국신문>을 10여 년간 경영하며 가산을 탕진하여, 그의 말년에는 허물어져가는 셋집에서 먹을 끼니조차 없이 지내게 되었다. 그는 병석에 누워서도 변변하게 죽 한그릇 먹지 못하다가 결국 1925년 8월 31일 0시 10분 영양실조로 오막살이 집에서 순국하였다. 향년 68세였다. (주석 81)

이종일 선생이 아사하던 해 6월 6일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고 우리 역사를 근원에서부터 왜곡하는 작업을 했다. 1922년 12월 훈령 제64호를 통해 설치했던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총독 직할체제로 확대개편한 것이다. 어용학자들이 동원되고 그중에는 기미년 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도 포함되었다.

국치 이래, 3.1혁명 좌절 이후 수많은 매국노·친일파들이 일제에 빌붙어 귀족이 되고 은사금을 받더나 감투를 쓰고 호의호식하면서 부귀광영을 누렸다. 그리고 나라를 지키고자, 되찾고자 한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굶어죽었다. 감옥에 가고 수배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조선 후기 학자 김득신이 1억 1300번이나 외웠다는 사마천의 <사기> '백이열전(伯夷列傳)'에 나온다. "백이와 숙제는 어진 덕망을 쌓고 행실을 깨끗하게 하였건만 굶어죽었다. 춘추시대 말기에 나타난 도적 도척(盜跖)은 날마다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간을 회쳐 먹었다. 잔인한 짓을 하며 수 천 명의 무리를 모아 제멋대로 천하를 돌아다녔지만 끝내 하늘에서 내려 준 자신의 수명을 다 누리고 죽었다. 어째서인가." 어째서일까.

오막살이 전셋집→영양실조→아사→절손→그리고 망각ㅡ잿빛 단어만 이어지는 생의 마지막 가는 길목이었다. 실학→동학→개화→광제창생→보국안민→순한글신문→독립협회→일제의 작위 거부→천도구국단→무장투쟁준비→독립선언서 인쇄→민족대표 33인→투옥→제2독립선언준비.

온통 핏빛과 보라색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통렬한 생애였다. 남긴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친지와 동지들이 겨우 장례를 치렀다.

선생의 친척이자 동지였던 이종린(李鐘麟)은 부고 소식을 듣고 털어놓았다.

별안간 이런 일을 당하여 할말이 없습니다. 사람의 평생이 웃습지요. 나는 고인을 친척으로 아는 것보다 동지로서 더 잘 압니다. 내가 같이 감고 하기를 30년 동안에 그의 30년 역사를 회고하면 자기를 위하여 하였다는 일은 별로 없고 오직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가산과 정열을 바쳤습니다. 성격이 고결관후하며 항상 조선 국문에 많은 취미를 가져서 국문연구와 사학에는 포부가 깊었으며 평생을 세상을 위하여 바쳤으나, 운명할 때는 미음거리가 없어 굶어죽다시피 하였으니, 이런 분이 어찌 우리 사회에 고인뿐이겠습니까. 살아서 호구를 못하고 죽어도 장례가 막연한 것이 지사의 말로라고 하면 너무 허무하지요. (주석 82)

일제강점기 순정한 '지사의 말로'가 이러했다. 단재 신채호의 표현(<조선혁명선언>)을 빌어 '강도일본'의 치하는 그렇다치고, 해방 후의 사정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미군정과 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비정통의 현대사는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득세하였다.
 
 이종일 선생의 묘역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민족사의 정맥을 이어왔던 이종일 선생, 심장이 뜨겁고 영혼이 맑았던 분, 개화지식인·계몽운동가·지조있는 언론인·한글학자·시민운동가·사회개혁사상가·민족종교인·무장독립운동가·민족대표 33인·독립선언문 인쇄·제2의 독립선언준비에 이르기까지 생애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으로 준비하고 실천한 경세의 지도자였다. 역사의 방향을 제대로 제시하고 그 길을 쭈빗거리지 않고 걸었다.

옛 글에 바르게 살다간 사람을 가리켜
유방백세(流芳百世)라 하고
잘못 살다간 사람을
유취만년(遺臭萬年)이라 하였다.

생활이 지극히 어려운 속에서도 청고한 기품과 기상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켰다. 이종일 선생보다 약간 뒤에 프랑스에서 태어난 끌로드 모르강은 독일군이 점령한 파리 한복판에서 비밀지하 신문인 <프랑스문학>을 발행했다. 임종 직전에 먼저 간 동지에게 드리는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을 지었다. 이종일 선생에게 바친다.

몸짓도 없고
꽃도 없고
종소리도 없이
눈물도 없고
한숨도 없이
사나이답게
너의 옛 동지들
너의 친척이
너를 흙에 묻었다
순난자여.

흙은 너의 영구대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오직 하나의 기도는
동지여
복수다. 복수다.
너를 위해…… (주석 83)

이종일 지사의 마침표 없는 통렬한 삶을 마무리하면서
한 마디를 덧붙인다.

"죽음에 대한 준비는 단 하나밖에 없다. 훌륭한 인생을 사는 것이다." - 프란츠 카프카.

지금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주석
79> 김용호, 앞의 책, 22쪽.
80> <묵암 이종일 선생 경세의 위업과 생애>, 26~27쪽.
81> 앞의 자료, 박걸순, 앞의 책, 126쪽.
82> <동아일보>, 1925년 9월 1일자.
83> 끌로드 모르강, 문희영 역,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71쪽, 형성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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