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옥의 시선]의대 정원 확대라는 블랙홀

하현옥 2023. 10. 18.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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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대통령이 제발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다. 한마디 할 때마다 수험생이 몇천명씩 늘어난다. 뭘 알고서 이야기하는 건지.”

입시를 앞둔 학부모들의 볼멘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6월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킬러 문항(초고난도 문항) 배제 지시에 이어 의대 정원 확대까지 윤석열 대통령의 한마디에 입시판이 요동치고 있어서다.

윤 대통령은 지난 6월 “(킬러 문항은) 약자인 아이들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고 “수십만명의 수험생을 대상으로 한 부적절하고 불공정한 형태”라며 킬러 문항의 수능 배제를 지시했다. “고도 성장기에는 사교육 부담이 교육 문제에 그쳤지만, 지금처럼 저출산 고령화의 저성장기에는 치명적 사회문제를 야기한다”는 게 킬러 문항 배제의 이유였다.

수능을 5개월 앞두고 전격적으로 이뤄진 대통령의 배려 넘치는 ‘수험생 구하기’에 수험생과 학부모는 혼란에 빠졌다. 반면 대통령의 의도와 달리 사교육 시장은 표정 관리를 하며 조용히 웃었다.

킬러 문항의 자리를 꿰차고 변별력을 좌우할 ‘준 킬러 문항’은 사교육의 힘을 다시금 보여줄 무대다. 교과 과정에서 배운 것을 출제해야 하는 만큼 암기식 평가 비중이 커질 수 있다. “‘관동별곡·사미인곡 암기반’이 생길 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달리 나온 게 아니다.

게다가 학원가에서는 ‘준 킬러 문항’이 재수생과 반수생 등 'N수생'에게 긍정적인 신호가 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오랜 기간 꾸준히 훈련한 학생이 유리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 결과 예상했던 대로 반수생이 줄줄이 입시에 다시 뛰어들었다. 사교육을 잡으려던 대통령이 사교육 시장에 신규 수요 창출을 한 셈이다.

「 필수의료, 지방 의사 부족에
공급 확대 가속 페달 밟지만
제도 개선 없이는 해결 안돼

그리고 또다시 사교육 시장에 ‘대통령 발 메가톤급 호재’가 도래했다. 이번엔 의대 정원 확대다. 3058명으로 17년간 굳어졌던 의대 정원을 1000여 명 늘리는 방안이 나올 것으로 알려지며 입시판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방아쇠를 당긴 건 윤 대통령이다. 필수의료 의사 부족과 지방 의료 붕괴를 막기 위해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하려던 정부가 대통령의 ‘대폭 확대’ 주문에 액셀러레이터를 밟게 된 것이다.

현재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치르는 2025년 대입부터 의대 입학 정원이 늘어날 것이란 예상 속, 사교육 시장의 ‘의대 마케팅’은 더욱 격화할 전망이다. 여파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의대 광풍 속 학원가에는 ‘초등 의대 준비반’ 입학 문의가 쇄도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대통령이 의대 광풍에 제대로 기름을 부은 형국이다.

입시에서 ‘의대 블랙홀’ 현상은 더 세질 전망이다. 수험생 커뮤니티 등에는 N수생의 참전으로 더욱 격렬해질 ‘의대 입시 대첩’에 대한 우려와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비수도권 의대생의 학교 갈아타기와 한의대와 약대, 수의대뿐만 아니라 이공계 학과 학생의 의대 갈아타기 위한 도미노 현상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의대 정원 확대로 ‘N수생 권하는 사회’가 도래할 기세다.

수능의 킬러 문항 배제와 의대 정원 확대가 N수생 증가와 사교육 열풍으로 이어지는 부작용은 대통령과 정책 당국이 예상한 시나리오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당위와 선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다. 사교육의 폐해를 막고 필수의료 및 지방 의료 강화를 위한 방안은 필요하다. 그럼에도 문제에 대한 냉정한 분석과 정책 등의 파급 효과에 대한 분석 없이 이뤄진다면 각종 부작용을 피할 수 없다.

의대 정원 확대가 ‘응급실 뺑뺑이 사망 사건’으로 대표되는 필수의료과 기피와 지방 의료 붕괴 등 현재 한국 의료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문제를 해결할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다. 공급을 확대해 의사 수를 늘리면 필수의료과로 지방으로 갈 것이라는 계산은 상황을 너무 단순화한 것이다. 그렇게 풀기에는 많은 변수가 얽혀 있는 고차방정식이기 때문이다.

생명과 직결된 필수의료과 기피 현상이 벌어지는 건, 이들 영역에 대한 의료 수가(건강보험에서 병·의원에 지급하는 의료행위 대가)가 너무 낮은 데다 지나친 민·형사 책임을 져야 해서다. ‘필수’라는 말에 걸맞게 꼭 필요한 분야라면 이들에게 확실한 경제적 보상과 함께 과도한 형사 책임 등을 줄이는 제도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 지역 의료 강화를 위해서는 일각에서 제기되는 지역의사제 도입 등도 고민해야 한다.

이런 고민과 조치 없이 의대 정원만을 늘리는 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다. ‘의대 블랙홀’ 속 의사는 늘어나겠지만, 정부가 ‘필요한 의사’는 여전히 부족할 것이다.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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