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줄자 분유산업 위축…축소경제의 악순환 시작
이젠 슈링코노믹스 시대
추석 연휴 전날인 지난달 27일 밤. 강원도 화천군 사창리의 한 모텔은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14년째 모텔을 운영한 윤기주(71)씨는 “면회·휴가 때문에 빈방을 찾기 어렵던 풍경은 옛말”이라며 “지난해 11월 인근에 있던 이기자 부대가 해체된 뒤 오늘처럼 객실 한 개도 받지 못하는 날이 많다”고 털어놨다. 이기자 부대가 떠나기 전까지 9곳이던 사창리 PC방은 현재 3곳만 남았고, 식당·상점도 줄줄이 문을 닫았다. 한때 ‘사스베이거스’(사창리+라스베이거스)로 불릴 정도로 근방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이었지만 인구 감소에 따른 군부대의 소멸은 지역 경제의 몰락을 불러왔다.
출생아 수 감소가 가파른 대한민국 전반에서 인구 감소→지역 경제 붕괴→거주민 이탈→또다시 인구 감소로 이어지는 일명 ‘슈링코노믹스’(축소경제)의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17일 강원연구원에 따르면 군부대 이전이 진행되고 있는 강원도 철원에서 6사단이 계획대로 빠져나갈 경우 연 소비지출이 916억원(지역 내 총생산의 6.5%) 줄고, 생산·소득에서 각각 1662억원과 1287억원의 경제적 피해가 발생할 것으로 추산됐다.
산업구조 전반의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분유회사는 적자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문구점은 2012년 1만4731개에서 지난해 말 8000여 개로 줄어든 것으로 추산된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분유업체가 건강식품 사업, 사교육 업계가 평생 재교육 시장에 뛰어드는 것도 살길을 찾으려는 지각변동의 시작”이라고 진단했다. 유진성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부양해야 할 인구가 늘면서 재정 부담이 불어나고, 미래 투자가 감소하는 등 경제 활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현역 급감→군부대 해체, 불야성 화천 ‘사스베이거스’ 몰락
어렵고 고된 일터는 이미 ‘인력난’을 겪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송파구의 아파트 공사 현장 인근 식당에선 외국인 노동자 20여 명이 식사하고 있었다. 식당 메뉴판엔 중국어·베트남어로 ‘드실 만큼만 가져가세요’라고 표기했다. 지난해 기준 전국 건설 현장 근로자의 14.1%가 외국인이다. 한 건설업체 현장소장은 “최근엔 숙련된 한국인 근로자가 고령화한 데다 젊은층이 현장 일을 기피하면서 고숙련 노동도 외국인으로 채우는 추세”라고 말했다.
조선·해운·농축산·수산·외식업 등도 공통적으로 인력 부족을 호소한다. 대전시 서구에서 중국집을 운영하는 한모(53)씨는 “5년 전부터 손님을 직접 맞이하지 않는 주방에선 동남아에서 온 노동자를 보조인력으로 쓰고 있다”고 말했다. 김희삼 광주과학기술원 교수는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이 늘수록 저숙련 일자리의 급여와 처우가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방 곳곳에선 슈링코노믹스가 ‘현재진행형’이다. 전남 영암의 한 어린이집은 올해 4월 폐원하고 요양원으로 변신했다. 한때 어린이 120명으로 가득 찼던 어린이집을 80~90대 노인 8명이 채웠다. 요양원장 서모씨는 “어르신 돌보는 일이 어린이 돌보는 것과 비슷해 ‘노(老)치원’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기준 전국 어린이집은 3만923곳으로 2017년 이후 약 1만 개가 사라졌다. 읍·면·동 단위에 어린이집이 없는 지역은 같은 기간 466곳에서 560곳으로 늘었다.
학령인구 감소는 지방 대학가를 덮친 지 오래다. 한국은행이 펴낸 ‘지역 대학의 위기와 지역 경제의 활성화’ 보고서에 따르면 2014~2018년 강원도 강릉 지역 대학생 3600여 명이 줄면서 지역 소비지출이 278억원 감소했다. 이에 주요 대학은 외국 학생을 유치하는 식으로 살길을 찾고 있다. 강원도 고성의 경동대 ‘글로벌 캠퍼스’엔 한국 학생이 거의 없다. 대신 네팔·방글라데시·베트남·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에서 온 유학생 950여 명이 주력이다. 학교 정문 앞엔 외국인 전용 마트와 식당이 여럿이다.
종교계도 비상이 걸렸다. ‘한국천주교회 통계 2022’에 따르면 교구 신학생 수는 2012년 1285명에서 지난해 821명으로 약 36% 줄었다. 새로운 사제 수는 같은 기간 131명에서 96명으로 감소했다. 개신교에서는 2023학년도 신학과 정시모집에서 목원대·칼빈대·협성대·고신대 등이 정원 미달이었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지난해 출가자 수는 61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2000년(528명) 이후 꾸준히 내림세다. 조계종은 일찍부터 ‘출가절벽 시대’에 대비해 왔다. 출가자 나이 한도를 40세에서 50세로 상향하고, 2017년에는 처음으로 출가자 모집공고를 냈다. 하지만 출가자 감소 추세를 뒤집지 못했다. 위기감이 커지면서 조계종은 지난달 ‘출가장려위원회’의 첫발을 뗐다. 매년 200명 이상 출가자를 5년 이내에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인실 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장은 “늦어도 10년 내 슈링코노믹스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면서 “기업이 육아휴직 같은 사내 문화 개선을 ‘보여주기식’으로만 활용할 아니라 장기적인 인적 투자로 봐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김기환·정종훈·정진호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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