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없는 전방, 유치원 대신 노치원…'축소경제’ 습격 덮쳐온다
추석 연휴 전날인 지난달 27일 오후 8시. 강원도 화천군 사창리의 한 모텔은 불이 모두 꺼져있었다. 붉은색 ‘MOTEL’ 조명만 반짝였다. 14년째 모텔을 운영한 윤기주(71)씨는 “휴가를 떠난 장병, 명절에 집에 오지 못하는 아들을 보러 멀리서 온 가족으로 빈방을 찾기 어렵던 풍경은 옛말”이라며 “인근 군부대가 떠난 뒤 오늘처럼 한 객실도 받지 못하는 날이 많다”고 털어놨다.
윤씨가 언급한 인근 군부대는 지난해 11월 해체한 육군 제27보병사단, 일명 ‘이기자’ 부대다. 1953년 창설한 이기자 부대가 떠나자 한 때 불야성을 이룬 ‘사스베이거스’(사창리+라스베이거스)도 이름만 남았다. 부대 인근 PC방과 펜션·모텔·식당이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다.
27사단을 해체하기 전까지 9곳이었던 사창리 PC방은 현재 3곳밖에 남지 않았다. 24년째 이곳에서 200석 규모 PC방을 운영한 박준각(55)씨는 “몇 년 전만 해도 명절 전날이면 PC마다 사람이 가득 찼는데 요즘은 하루 손님이 20명 정도 될 것 같다”며 “이기자 부대와 함께 조만간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지역 경제의 몰락을 가져온 군부대의 소멸은 예고된 미래였다. 출생아 수 감소가 본격화한 1990년대 후반 이후 태어난 인구가 성인이 되면서 현역병 입영자가 급감했다.
강원연구원은 역시 군부대 이전이 화두인 강원도 철원에서 6사단이 빠져나갈 경우 연 소비지출이 916억원(지역내총생산의 6.5%) 줄고, 생산·소득에서 각각 1662억원과 1287억원의 경제적 피해를 발생시킬 것으로 추산했다. 인구 감소→지역 경제 붕괴→거주민 이탈→인구 감소로 이어지는 일명 ‘슈링코노믹스(Shrink+Economics·축소 경제)’의 축소판이다.
슈링코노믹스는 인구 감소에 따라 경제 ‘허리’인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줄면서 생산·소비·산업·노동을 비롯한 경제 전반이 활력을 잃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언급하면서 쓰이기 시작했다.
국가 전체로는 인구 감소는 국내총생산(GDP)이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진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다른 요인이 같다고 가정할 경우 생산가능인구가 1% 감소할 경우 GDP가 약 0.59% 줄어든다. 한경연은 여기 근거해 인구구조에 따른 2050년 생산가능인구가 34.8% 줄었을 때 GDP가 2022년 대비 28.4%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유진성 한경연 선임연구위원은 “인구 구조가 ‘항아리형’에서 ‘역(逆)피라미드형’으로 바뀌고 있다”며 “경제 ‘허리’인 생산가능인구는 주는데 부양해야 할 인구가 늘면서 재정 부담이 불어나고, 미래 투자가 감소하는 등 경제 활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산업 구조 전반에도 변화가 시작됐다. 분유 회사는 적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학습지·참고서 시장도 쪼그라들었다. 국내 완구 제조업체 생산액은 2003년 3705억원에서 2019년 2806억원으로 감소했다. 학생들의 준비물·먹거리를 책임지던 문구점은 2012년 1만4731개에서 지난해 말 약 8000여개로 줄어든 것으로 추산된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슈링코노믹스의 파고가 당장은 영유아 산업에 타격을 미치고 있지만, 점차 청년층으로 영향을 확대할 것”이라며 “분유 업체가 건강식품 사업, 사교육 업계가 평생 재교육 시장에 뛰어드는 것도 쪼그라든 시장에서 살길을 찾으려는 지각변동의 시작”이라고 진단했다.
어렵고 고된 일터는 이미 ‘인력난’을 겪고 있다. 지난 9일 한글날 서울 송파구의 아파트 공사 현장 인근 식당은 외국인 노동자 20여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당 메뉴판엔 중국어·베트남어로 ‘드실 만큼만 가져가세요’ 문구를 표기했다. 건설근로자공제회에 따르면 지난해 3월 기준 전국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근로자의 14.1%가 외국인이다. 한 건설업체 현장 소장은 “10여년 전만 해도 외국인 노동자는 ‘잡부’라고 불리는 저숙련 건설 노동을 주로 맡았다” “하지만 최근엔 숙련된 한국인 근로자가 고령화한 데다 젊은 층이 ‘노가다(일용직 건설근로자)’를 기피하면서 고숙련 노동도 외국인으로 채우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건설업뿐 아니라 조선·해운·농축산·수산·외식업 등 힘들고 고된, 일명 ‘3D’ 직종은 공통적으로 인력 부족을 호소한다. 대전 서구에서 중국집을 운영하는 한모(53)씨는 “한 달에 월급을 300만원씩 줘도 한국 젊은이들은 버티지 못하고 금방 나간다”며 “5년 전부터 손님을 직접 맞이하지 않는 주방에선 동남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를 보조 인력으로 쓰고 있다”고 말했다.
저숙련 일자리를 중심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수혈하는 현실이 불가피하지만, 마냥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2020년 펴낸 ‘외국인력 도입의 내국인 고용 영향’ 보고서에서 “외국 노동자의 유입은 특히 저학력·저숙련 근로자 고용에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며 “외국인 노동자를 개별 사업장에 배치한 지 3개월 뒤부터 내국인 고용이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김희삼 광주과학기술원 교수는 “현재 추세대로라면 인구 감소에 따른 일자리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피할 수 없다”며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이 늘수록 저숙련 일자리의 급여와 처우가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인구 감소의 직격탄을 맞은 지방 곳곳에선 슈링코노믹스가 ‘현재 진행형’이었다. 저출산의 파고가 가장 먼저 덮친 건 어린이집·유치원 등 보육시설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전국 어린이집은 3만923곳이다. 2017년 4만238곳이었는데 5년 새 1만개가 사라졌다. 읍·면·동 단위에 어린이집이 없는 지역은 같은 기간 466곳에서 560곳으로 늘었다.
전남 영암의 한 어린이집은 올해 4월 폐원하고 요양원으로 변신했다. 한때 어린이 120명으로 가득 찼던 어린이집을 80~90대 노인 8명이 채웠다. 요양원장 서모씨는 “2021년부터 2년 동안 어린이집을 내놨지만 넘겨받겠다는 사람이 없었다”며 “어린이는 줄고, 어르신은 늘어나는 상황인 데다 어르신 돌보는 일이 어린이 돌보는 것과 비슷해 ‘노(老)치원’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고 말했다. 경기 김포 통진읍의 한 어린이집은 지난달 1일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폐업했다. 2020년 60명이었던 어린이가 올해 12명으로 줄어든 영향이다. 20년간 어린이집을 운영한 유태우(73) 원장은 “마지막 남은 원아 학부모들이 ‘스쿨버스가 없어도 직접 등하원시키겠다’며 사정하는 탓에 버텨왔지만, 경영난이 심해 더는 폐업을 미룰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저출산에 따른 학령인구 감소는 대학가도 덮친 지 오래다. 청년이 사라진 지방대 곳곳은 이미 외국인 유학생이 점령했다. 강원도 고성의 경동대 ‘글로벌 캠퍼스’엔 한국 학생이 거의 없다. 대신 네팔ㆍ방글라데시나 베트남ㆍ우즈베키스탄ㆍ카자흐스탄 등에서 온 유학생 950여명이 주력이다. 학교 정문 앞엔 외국인 전용 마트와 식당이 여럿이다. 관광지와 가까운 이곳은 아르바이트생도 외국인인 경우가 많다. 경동대 관계자는 “유학생이 없으면 인근 지역 경제가 마비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의 소멸은 곧 지역 경제의 위기다. 강원연구원에 따르면 대학생 1명이 유발하는 월 경제 효과가 100만원이다. 한국은행이 2019년 펴낸 ‘지역 대학의 위기와 지역 경제의 활성화’ 보고서에 따르면 2014~2018년 강원도 강릉 지역 대학생 3600여명이 줄면서 지역 소비지출이 278억원 감소했다.
이상림 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대학 및 대학생은 지역 경제의 중요한 소비자이자 노동인력 공급자 역할을 한다”며 “당장은 대학생 감소가 지역 서비스업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역 일자리를 비롯한 경제 전반에 미치는 부작용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IMF는 2020년 펴낸 ‘슈링코노믹스, 일본이 주는 교훈’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일본에서 저출산고령화가 경제·재정적 측면부터 도시의 형태와 공공정책(연금·보건의료 등)까지 경제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의 지난해 합계출산율(0.78명)은 세계 꼴찌다. 일본보다 가파르게 저출산·고령화 수령에 빠져들고 있다. IMF가 한국판 슈링코노믹스 보고서를 낼 날도 머지않았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화천·김포·세종=김기환·정종훈·정진호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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