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할배'만이 할 수 있는 배우 인생 60년 뒷이야기
[이준목 기자]
대한민국 연기 역사의 산 증인인 레전드 원로 배우들이 60년 연기인생과 방송가의 숨은 뒷이야기들을 유쾌하게 풀어냈다. 16일 방송된 tvN 스토리 예능 <회장님네 사람들>에서는 방송 1주년을 맞이하여 '돌아온 꽃할배' 이순재와 박근형이 특별 초대손님으로 출연했다.
이순재, 박근형, 김용건은 나영석 PD의 여행예능 <꽃보다 할배> 시리즈 이후 5년 만에 재회했다. 가장 늦게 합류한 박근형은 말끔한 수트를 차려잡고 '미노년'의 간지를 뿜어내며 김용건으로부터 "마이클 더글러스 같다"는 감탄을 자아냈다.
박근형은 1963년 KBS 3기 공채 탤런트로 연기를 시작했고 1970년대 당시 신생방송사였던 MBC로 스카웃되어 활동했다. 전성기인 30대 시절에는 이정길과 함께 당대 멜로물의 간판배우로 활약했다.
김수미는 "이순재와 박근형은 왜 전원일기에 나온 적이 없나?"라고 궁금증을 드러냈다. 김용건은 "그때는 이미 주인공만 하고 있었을 때니까"라고 대신 설명했다. 하지만 이순재는 "그때는 방송사 소속이 달라서 그랬다"고 덧붙였다. 박근형은 "MBC를 나가고 얼마 지나서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그래서 MBC에서 안 불러준 것"이라고 말했다.
노배우들은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끈끈한 우정을 이어오고 있었다. 80대를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히 활동 중인 이순재와 박근형은 최근에도 서로의 연극 공연을 찾아가 응원하기도 했다. 박근형-김용건-백일섭-최불암 등은 1970년대부터 죽마고우로 유명했고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라고.
박근형의 가문은 현재 아들 윤상훈(박상훈), 손자 박승재도 선대의 뒤를 이어 연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배우 3대다. 이순재는 후배인 박근형을 "전설적인 배우"라고 극찬하며 올해 6월 박근형이 주연한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을 보러갔던 일화를 밝혔다.
박근형의 연극 출연이 너무 반가워 한걸음에 달려갔다는 이순재는 "우리 앞으로 연극 많이 하자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나마 연극이라도 할 수 있는 80대 배우가 이제 몇 명 없다"며 세월의 흐름 속에 유능한 노배우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거나 잊혀져가고 있는 데 대한 아쉬움을 털어놨다.
김수미가 손님들을 위한 특별한 시골밥상을 준비할 동안, 이순재-박근형-김용건 꽃할배 트리오는 재료를 쓸 새우를 잡기 위하여 양식장을 찾았다. 김용건은 "오늘 촬영한 분량을 '꽃할배-강화' 편으로 해서 나영석 PD에게 팔자"며 농담을 던졌다.
세 노배우는 자연스럽게<꽃할배>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여행지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도시로 박근형은 꽃이 아름다웠던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를, 이순재는 스페인의 알람브라 궁전을, 김용건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지였던 오스트리아 빈을 각각 꼽았다.
꽃할배들은 남미 쿠바를 가고 싶어했으나 무산되었던 뒷이야기를 전했다. 이순재와 김용건은 코로나19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박근형은 "나영석 PD가 다른 프로그램을 제작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그래도 박근형은 "할배 5명이랑 같이 있으면 골치아프고 피곤할 것"이라고 웃으며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편으로 꽃할배들은 제작진에게 서운했던 부분도 하나둘씩 털어놓았다. 박근형은 여행 동안 가장 힘들었던 부분으로 박근형은 주방이 없어서 항상 세면대에서 요리를 해먹어야했던 환경을 꼽았다. 김용건은 "꽃할배는 모두 어르신인데 음식이나 숙소도 고급스럽게 했어야 했다. 좁은 민박집에서 한방에 함께 지내며 불편한 게 많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순재는 "늙은이들 데려다놓고 바닥에 재우는 것"이라며 동조했다.
80대 배우들에게 가장 곤욕은, 장시간 걸어다니는 것이었다. 이순재는 스페인 여행 당시 가우디 성당투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려서 헤맸던 일화를 털어놨다. 박근형의 잘못된 조언으로 엉뚱한 지하철역에서 하차했고, 할배들은 두 세 시간을 빙빙 돌다가 끝내 폭발한 신구가 나PD 앞에서 가방을 던지며 농반진반으로 성질을 부렸다고.
그럼에도 꽃할배들은 여행 중 서로간의 갈등은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술을 마시지 않는 이순재와 박근형, 애주가인 신구와 백일섭은 각자의 성향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함께 여행을 즐겼다. 다리가 불편하여 자주 뒤로 처져야만 했던 백일섭은 무거운 짐을 들고 이동하다가 분노하여 반찬통을 걷어차는 레전드 명장면을 남겼다.
또한 꽃할배 시리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짐꾼' 역할을 맡은 이서진이었다. 본래 다른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줄 알고 들떠서 왔던 이서진은 나영석 PD에 속아 공항 현장에서 할배들을 수발하는 짐꾼임을 알게되어 크게 당황하는 표정이 적나라하게 카메라에 잡혔다. 이순재는 "이서진이 젊은 애들과 여행가는줄 알고 신나했는데, 꼰대가 4명 나타나니까 깜짝 놀라더라"며 껄껄 웃었다.
1990년대 최고 화제작중 하나인 드라마 <모래시계>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나왔다. 박근형은 이른바 '회장님 전문배우'로 유명했다. <모래시계>에서 극중 주인공 윤혜린(고현정)의 부친인 카지노계 대부 윤재용 회장 역은, 박근형이 연기한 수많은 회장님 중에서도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대표 캐릭터로 회자된다.
김용건은 자신도 연출자인 고 김종학 PD로부터 <모래시계>의 출연제의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본래 김용건이 원했던 것은 박근형이 맡았던 윤 회장 역할이었지만, 정작 제안받은 역할은 김병기 배우가 연기한 정보부 요원이었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역할이라고생각해서 거절했던 김용건은, 막상 드라마가 크게 성공하며 김병기의 비중이 생각보다 높은 것을 보면서 "그 역할이라도 할 걸 그랬다"며 나중에 크게 후회했다고.
박근형과 동갑인 최불암은 또래들이 한창 멜로물의 주연을 할 동안, 젊은 나이부터 '노인 전문배우'로 이미지가 굳어졌다. 이순재는 배우들끼리 흔히 노인 전문 연기자들을 놀리는 농담으로 "키스신 해봤냐"고 물으면 신구가 "그런건 왜 물어보냐"고 발끈했다고.
멜로 경험이 있는 이순재와 박근형은 젊은 시절 여배우와 베드신을 연기하면서 겪어야했던 고충을 털어놨다. 이순재는 배우 사미자와 베드신을 찍다가 친분이 있던 사미자의 남편이자 동료배우였던 김관수가 얼굴에 아른거려서 촬영에 집중을 못해 웃음을 터뜨려 사미자로부터 구박을 들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또한 박근형은 베드신을 촬영해야하는 상황에서 상대배우인 박원숙이 한사코 노출을 거부하며 울음을 터뜨리자 설득 끝에 타협안으로 중요부위 곳곳에 파스를 붙이고 연기했던 일화를 회상했다.
당시 열악했던 영화 촬영장은 지금처럼 체계적이지 못하고 안전불감증도 심했다. 심지어 이순재는 "도망가는 장면에서는 실탄을 쐈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털어놨다. 현재 중견배우가 된 윤유선은 8살 아역 시절에는 단독 컷을 위하여 3층집 지붕 꼭대기에 안전장치도 없이 올려놓고 위험천만한 촬영을 하기도 했다고.
박근형은 "정말 무지막지했다. 죽거나 말거나였다"며 고개를 저으며 배우가 종종 목숨을 걸고 연기를 해야했던 그때 그 순간을 떠올렸다. 이만희, 임권택 등 이른바 한국영화의 거장이라고 불리우던 감독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현재는 명배우로 성장한 김혜수도 꽃할배들과 인연이 있었다. 김혜수는 10대 여고생이던 시절에 데뷔하여 성인 연기를 펼쳤다. 1991년 <장및빛 인생>에서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무려 30년 연상의 박근형과 멜로에서 부부 연기까지 펼치기도 했다. 또한 이순재는 현재 66살이 되었던 강남길을 초등학생 시절에 데리고 함께 데리고 연기하면서 하도 까불어서 야단을 쳤던 일화를 회상하며 웃음을 자아냈다.
한편으로 박근형은 당시 아역배우들의 현실에 안타까웠던 순간을 떠올렸다. "문화계에 일찍 데뷔하는 아이들이 아이답게 크지 못하고 일찍 동심을 잃는 게 안타까웠다. 그 애는 애를 건너뛰는 거다"라며 아역들의 이른 데뷔를 반대했다고 밝혔다.
이순재는 아역에서 성인 연기자로 성장한 모범사례로 국민배우 안성기를 꼽았다. 이순재는 연극 <영여인간>에서 부자 역할로 안성기와 공연한 적이 있었다. 당시 충무로의 명아역이었던 안성기는 이후 활동을 한동안 중단하고 평범한 학창시절에 전념했고, 성인이 되어서 다시 연기자로 복귀하여 대배우로 거듭났다.
당시는 아역이 성인배우로까지 성공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개인의 삶도 순탄하게 못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박근형은 "아역 배우들이 사회적으로 버려져서 오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아역은 짧게하고 성인이 되어서 다시 연기하라고 했는데 말을 잘 안 들었다"며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린 아역 출신배우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털어놨다.
세상을 떠난 코미디언 고 이주일과의 일화로 소개됐다. 이주일과 친분이 두터웠던 박근형은 무명시절, 악극단 공연을 하는 이주일의 간곡한 부탁으로 여장까지 했던 흑역사를 털어놓았다.
김수미와 이순재는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함께 공연했던 경험이 있었다. 당시 치매노인을 연기했던 김수미가 즉석에서 흙을 손으로 퍼먹거나, 화장실에서 두루마기 휴지를 몸에 두르고 나오는 애드리브(즉석 연기)를 선보인 것을 떠올리며 이순재는 "창의력 넘치는 배우"라고 극찬했다.
이순재는 임현식-이한위-박철민 등 이른바 애드리브로 유명한 배우들의 계보를 거론하며 "임현식은 오버 연기가 아니다. 적절한 선에서 애드리브를 잘 활용하는 거"라고 호평하면서 "이한위는 조금 튀고, 박철민은 심하게 튄다"라고 쓴소리를 했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함께 공연했던 이순재는 연주 장면에서 지나치게 오버연기를 하는 박철민에게 "이건 코미디가 아니라 정극이다. 진짜 오케스트라라고 생각해야한다. 설정은 적당히 해라" 하고 후배를 위하여 진심어린 충고를 했었던 일화를 밝혔다.
이순재는 평생 배우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데 묵묵히 내조해준 아내에게 감사를 전했다. 연기자로서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뒷바라지를 해준 아내 덕분에 이순재는 연기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고.
출연소감으로 처음엔 뭘할 수 있을지 몰라 출연을 망설였다는 박근형은 "옛 친구들을 만나서 입이 트이니까 너무 재미있었고 자연스럽게 추억에 녹아들었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김수미는 가장 웃어른인 이순재의 손을 부여잡으며 "선생님은 우리 배우들의 영원한 선배다. 그러니까 더 건강하셔야한다"고 격려했다. 출연자 전원은 꽃할배들의 건강과 열정을 기원하며 다함께 따뜻한 박수를 보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원로들만이 들려줄수 있는 인생의 경험담과 조언, 어디에서도 접하기 힘든 그시절 배우들의 진짜 삶과 연기론, 다사다난한 연예계의 숨은 뒷이야기 등은, 그 어떤 토크쇼보다도 따뜻한 진정성과 자연스러운 공감대를 자아냈다. 한편으로 아직도 여전히 현역에서 활동할만한 능력과 열정이 있는 이러한 원로 배우들을 방송가와 대중문화계에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도 느끼게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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