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만 150권, 50년 동안 일기를 쓴 이유

나유진 2023. 10. 1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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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에세이집 '어느 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경혜 작가

[나유진 기자]

 에세이집 <어느 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 보리출판사
   

"일기의 매력은 좋든, 나쁘든 자신의 변화를 보게 되는 거죠. 때로는 한심하거나, 때묻은 자신을 보기도 합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하거든요."

에세이집 <어느 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저자 이경혜 소설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일기 중독자'로 부르는 그녀는 50년 동안 150권의 일기를 써왔다.

일기를 쓰겠다고 결심한 건 열세 살. 5년 동안 일기를 쓴 사람의 기사를 읽고 나서였다. 멋있어서 따라 했는데 50년째 쓰고 있다. 일기를 꾸준히 쓸 수 있던 비결은 진실의 힘이었다. 다른 데서 털어놓기 힘든 이야기를 마음껏 적었더니 그 즐거움에 빠졌다. 일기에 어디까지 솔직했던 걸까.

"진실하게 쓴다는 게 사실을 속속들이 쓴다는 건 아닙니다. 철학가 루소는 자서전 <고백록>에서 도둑질 후 다른 사람에게 누명을 씌운 얘기까지 썼다고 하죠. 하지만 저는 일기장에 '고백'하지 않아요. 만약 그런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면 일기장 속에서 몸부림쳤을 테고 그 흔적이 남았겠지만요. 너무 괴로울 땐 일기를 못 쓰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일단 쓰기 시작하면 진실하게 쓰죠. 어릴 때부터 그랬고, 거짓으로 쓰는 건 의미가 없으니까요."

어떤 이들은 청소년기의 일기가 데스노트 수준이라고 말한다. 일기에 미워하는 사람들을 적거나, 저주하거나. 이 작가 또한 그런 마음까지 모두 적었다. 반대로 남이 아닌 자신에 대한 혐오를 담은 적도 있다. 위악적으로 자신을 몰아세우며 모든 감정을 쏟아냈다.

"스스로를 후벼 파듯 분석하고 신랄하게 조롱할 때가 있어요. 괴롭죠. 그런데 끝까지 가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차분해져요. 내 진짜 마음을, 내 못난 모습을 마주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게 된 거죠. 일기는 사회적 기대에서 벗어난 저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일기를 대하는 이 진실함은 지금도 굳건하다. 한 번은 청소년기의 일기를 책으로 내자고 제안받은 적이 있다. 오래전 일기라도 대중에게 공개하는 순간 다시는 비밀 일기를 못 쓸 것 같아 거절했다. 대신 일기 일부만 에세이집 <어느 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에 실어, 일기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설득력 있게 담았다.
 
 이경혜 작가와 그녀의 일기장
ⓒ 이경혜
 
이 작가는 일기 쓰는 게 어려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매일 쓸 필요도, 특별한 내용을 담을 필요도, 형식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고. SNS 게시물부터 핸드폰에 남긴 생각 한 줄도 일기라며, 일상의 기록이 소중한 거라고 얘기한다. 일기는 장문의 글이고, 반성과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볍게 깬다.

일기를 쓰면 문장력이 좋아져 작가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냐는 질문에도 아니라고 답한다.

"지금까지 편하게 막 써왔고 휘갈길 때도 있어요. 글을 다듬거나 수정하지 않죠. 제 경우만 보면 문장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돼요. 또 스스로를 분석하고 해부하는 게 익숙해져서,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묘사할 힘이 생기죠. 이 점이 작가가 되는 데 도움이 됐을 수 있겠네요."

하지만 일기의 역할을 자기 개발이나 인격 수양에 두지 말라고 당부했다.

"오래전 일기를 읽으면 그사이에 내가 성장한 게 보여서 읽는 맛이 있어요. 그런데 일기를 쓴 덕에 인격이 성장한 건 아니에요. 세월과 경험이 쌓이면서 성숙해진 거죠. 일기를 통해 달라진 모습을 확인할 뿐이고요. 일기에 대단한 역할을 바라면 안 됩니다."

편하게, 즐겁게 쓴 일기는 시간이 지나서도 그만한 즐거움을 줬다. 딸들에게 딸 나이 때 쓴 일기를 보여준 적이 있다. 아이들은 엄마도 자기처럼 열세 살 소녀였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매우 좋아했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온전히 담은 책이기에, 일기는 자신이 주인공인 대하소설 같았다. 일기에서는 조연도 단역도 아닌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제 일기를 시기별로 나눴을 때 각각 어떤 장르의 소설인가 생각했어요. 크게 보면 성장소설이고요. 20~30대 때는 연애 소설이나 역사 · 사회 소설로 볼 수 있어요. 아니다, 어떻게 봐도 다 성장소설이에요."

일기는 전용 타임머신이기도 했다. 그녀는 일기 기념일을 정해 1년에 한 번 그간 쓴 일기를 쭉 읽는다.

"예전에는 너무 후회돼서 바꾸고 싶은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것조차 받아들이게 되어 굳이 가고 싶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행복했던 순간도 한 번으로 만족해요. 한 번이니까 더 소중하잖아요. 이제 일기를 통해 시간여행 하는 걸로 충분해요."

일기가 남다른 의미인 만큼 집에 도둑이 든 날도 일기장을 보관한 책장부터 확인했다. 다른 물건은 돈 주고 살 수 있지만 일기는 아니었다. 잃어버린다면 삶의 일부를 담은 시간 저장소가 사라지는 거였다. 그 어떤 비싸고 귀한 물건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이경혜 작가의 일기장
ⓒ 이경혜
   
일기와 관련된 책으로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소개했다. 강원도에 사는 이옥남 할머니가 66세부터 30년 동안 쓴 일기를 엮은 책이다. 한 여성의 소박한 삶이 얼마나 큰 감동을 주고, 경외심을 들게 하는지 알려준다. 일기란 그런 거였다.

이 작가는 일기 예찬론자지만 일기를 쓰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안 쓰고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단지 일기를 쓰면 흩어져 사라지는 삶의 퍼즐을 하나라도 더 맞출 수 있고, 나를 지탱하는 힘을 갖게 된다고 얘기했다.

"오래전 제 장점이라고 여긴 것들이 비난받은 적이 있어요. 내세울 게 사라지니 스스로 하찮게 여기는 시간이 길어졌죠. 그러다 저를 다시 보게 된 때가 있었어요. 특별한 계기는 없어요. 그냥 '나는 아름다운 인간이야'라는 말이 섬광처럼 떠올랐죠. 그 마음이 소중해 일기에 바로 적었고, 저를 조금씩 되찾았어요. 세상이 나를 버려도 일기는 나를 지켜봐 주는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이경혜 작가에게 일기란 '가장 나다운 글'이었다. 내 삶을 한 글자씩 풀어내, 있는 그대로 나를 마주하는 시간. 그녀는 150권의 책에 자신만 기록할 수 있는 자신의 역사를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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