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추모비 앞에 놓인 참이슬과 신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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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9월 2~7일, 씨알재단(이사장 김원호)이 주관한 '일본 관동대학살 100주기 추모제'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관동대학살은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일본 관헌과 민간인들이 재일조선인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을 말합니다.
게다가 일본말도 서툴지요.
일행 중 먼저 일본에 가셨던 분이 추모제 준비에만도 혼자 일이 벅찬데, 일행들 숙소까지 세밀히 살펴 구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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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9월 2~7일, 씨알재단(이사장 김원호)이 주관한 '일본 관동대학살 100주기 추모제'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관동대학살은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일본 관헌과 민간인들이 재일조선인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을 말합니다. 학살 당한 대부분이 먹고 살 길을 찾아 현해탄을 건넌 일용직 노동자에, 부두 하역 잡부들, 그리고 그 식솔들이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씨알(민초)이었을 뿐인데...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납니다. 그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 치른 5박 6일간의 추모제 동행기를 쓰고자 합니다. <기자말>
[신아연 기자]
(*지난 기사, '일본어를 전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에서 이어집니다)
숙소가 나이스하지 않았던 이유요? 바비인형집이나 레고블록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네, 너무 좁았던 거죠. 일행 중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후 뒤를 닦으려고 하니 팔이 벽에 닿아 제대로 돌릴 수가 없었다며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샤워 부스는 세워 놓은 관처럼 몸이 꽉 끼었고요. 그나마 발가벗고 들어가니 들어갈 수 있었지요.
이런 크기의 방에 두 명이 함께 잤습니다. 어떤 땐 세 명도. 밤에 화장실이라도 갈라치면 자칫 서로 밟고 밟힐 지경이었죠. 나이스 호스텔이 나이스하지 않았던 이유죠.
씨알재단이 인색하고 물색없어서 그런 숙소를 잡았던 건 아닙니다. 추모제 준비만으로도 너무 바빠서 그랬습니다. 6661명의 넋을 8명이 달래야 하는 상황이니. 게다가 일본말도 서툴지요. 척척 이동시켜줄 차가 있는 것도 아니지요. 그러니 행사장 인근에 숙소를 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도 일반 주택가라 선택이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요. 일행 중 먼저 일본에 가셨던 분이 추모제 준비에만도 혼자 일이 벅찬데, 일행들 숙소까지 세밀히 살펴 구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 동경 아라카와 강변 관동대학살 추모공간 봉선화집 |
ⓒ 신아연 |
나리타공항에 내려 경유지 케이세이 우에노역에서 허겁지겁 아침 겸 점심을 먹은 후 야히로역에 도착한 시각은 대략 오후 12~ 1시. 새벽 2시에 집에서 나와 드디어 목적지에 왔군요!
우리가 맨 먼저 가야할 곳은 야히로역 바로 뒷편의 상설추모공간 '봉선화집'입니다. 그래봤자 주택가에 마련된 박스 형태의 작은 사무실과 손바닥만한 마당이 전부인 곳입니다.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잔혹한 학살로 희생된 조선인들의 추모를 양심 있는 일본인들이 몇 십년째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
▲ 봉선화집 추모비 앞에 놓인 참이슬과 신라면 |
ⓒ 신아연 |
조촐한 추모비 앞에 놓인 참이슬 소주와 신라면이 도드라져 보이네요. 재일동포들이 다녀간 것일까요? 일본산 우롱차도 놓여져 있고요. 대학살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니만큼 추모객들이 줄을 잇습니다. 모두 일본사람들입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좁은 골목길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습니다. 날은 또 왜 그렇게 무덥던지요. 제 기억 속 가장 더운 날로 남을만큼. 처참하게 죽임 당한 6661명 원혼의 숨결이 뒤엉켜있었던 때문일까요.
▲ 추모하는 씨알재단의 김양호 피디 |
ⓒ 신아연 |
우리 일행도 추모비 앞에 섰습니다. 숙소에 짐을 풀지 않고 바로 왔는데, 주변이 워낙 좁아 가방 둘 곳이 없어 그대로 등에 맨 채. 사진은 김양호 PD의 뒷모습입니다. MBC, SBS, 전주방송(JTV)에서 일하며 관동대학살을 일반에 알리는 유튜브 동영상을 제작하신 분이죠. 지금은 또 100주년 추모제 행사를 담은 동영상을 만들고 계시겠지요.
그런데 추모회를 왜 '봉선화집'이라고 부를까요? 관심있게 글을 읽은 눈치 빠른 분들은 이렇게 물으실 것 같은데요. 위 추모 사진에도 봉선화가 심어져 있는 게 보이시죠?
그 이유는 다음회에 말씀드릴게요.
(* 다음 기사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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